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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의 기억
2002-02-27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한국에서 벌어지는 학술 심포지엄이니 토론회니 이름 붙은 행사들은 대개 가장 진지한 형태의 코미디들이다. 내 생각에, 한국의 학술이 갖는 내용과 수준은 도무지 그렇게 많은 심포지엄이나 토론회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런 학술 행사의 목적이란(그런 행사가 내건 목적과는 애당초 상관없이) 그런 학술적 행사의 개최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개최와 참여 자체에 있다. 행사 진행이 예정 시간보다 늘어지고 있음이나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행사의 실제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려 분투하는 진행, 아무런 내용이 없거나 너무나 지당해서 새삼 발표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발표, 이른바 학술계의 위계에 입각한 비굴한 아부와 타협의 이런저런 변형으로서 토론, 그리고 그 모든 코미디의 총화인 술잔을 휴지로 받쳐들고 분주히 사교에 몰두하는 리셉션!

잡글이나 쓰는 처지인지라 그런 코미디의 주최나 참여를 일삼지 않아도 되는 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이런저런 인간적 인연들을 무작정 거스를 순 없어 빼고 미루다 가끔은 그런 공간에 불려나가기도 간다. 학술의 공간이 학자가 아닌 나를 부르는 이유야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구성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꾀하자는 것일 테고, 나 또한 발표니 토론이니 하는 행사의 알맹이에야 애당초 기대를 안 하고 그저 두어 시간 눈감는다 마음먹고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놈의 방명록이 놓인 행사장의 입구에 들어설라치면 알 수 없는 낭패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니 나도 참 어지간한 인간이지 싶다. 하긴 나이 마흔에 넥타이도 맬 줄 모르는 인간이 그리 많진 않을 테니.

불가사의한 자신감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방자한 인간이라도 만나게 되면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가장 근거없이 안락하기에 가장 방자해진 직업인 교수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그런 인간을 만나는 일은 오히려 필연이다. “오, 네가 그 김규항이란 놈이냐”, 웃음 짓는 기름진 얼굴을 면전에 두고도 나를 오게 한 사람의 미래를 근심하며 눌러참고 돌아와선 “그런 자식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다니…. 아무래도 내게 노예근성이 있는가” 하며 나는 끔찍해 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토론회에서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은 진보적 인사들’을 만나는 일은 좀더 고통스럽다. 10여년 전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충만했고 그 덕에 이름을 알린 그들은, 진작에 그 신념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10여년 전 제 이력을 ‘사용’하며 진보적 인사로 행세한다. 그들의 그런 야비한 처신은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후 한국 인텔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안락한 처신이다. 10여년 전 진보의 이력엔 더이상 탄압과 공포가 적용되지 않지만 그 이력은 오늘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고 그들의 양심과 지성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입으로나 신념에 충실한 내가 그들이 신념을 버린 일까지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보노라면 그저 욕지기가 난다.

지난해 가을 이후 불려간 두번의 진보적 심포지엄은 그런 인사들로 가득했다. 난 예의 야비한 처신을 대대적으로 목도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제 처신을 둘러싸고 그들 나름의 공고한 협력체제를 확보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0여년 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자였던 한 교수는 은근슬쩍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주장하고, 10여년 전 혁명의 박두를 노래하던 한 시인은 오늘 우리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정신적 카오스 상태에 있다 노래한다. 자신의 옛 신념의 근거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정신적 공황을 일반화하는 일은,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강변하고 그 처신에 어떤 설명도 요구받지 않으려는 그들의 일치된 욕망에 봉사한다. 학술의 공간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로 가득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물을 때, 그들은 일제히 능글맞게 외친다. “다 알면서 뭘 그러셔.”김규항/ 출판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