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에서 태어나 육지로 나가 떠돌다가 다시 거문도로 들어가 살고 있는 작가 한창훈. 섬에 사는 갑남을녀의 속절없는 사랑 이야기를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에 담았다.
“저쪽에서 봄바람이 부는가 싶은데 그만 내 가슴속에 꽃이 피어버리는 것. 쌍방이 그러한 것. 이쪽에서 마늘을 까기 시작하는데 저쪽에는 벌써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 그것 또한 서로 그러한 것. 그게 사랑 아닌가.”작가 한창훈이 내린 사랑의 정의다.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의 표제작에 나오는 대목. 소설집에는 아홉 단편이 묶였는데, 그중 일곱이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풋사과처럼 떫은 소녀의 사랑에서부터 물러터진 홍시 같은 창녀의 사랑까지 여러 층위와 색깔의 사랑을 만날 수 있다. 그러 나 그런 외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랑이 과거형이라는, 그러니까 지나가버린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이 이야기들을 애수와 회한의 한결같은 분위기로 감싼다. 말하자면 한여름의 장미나 배롱나무꽃 같은 화사하고 들뜬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이나 시든 가을꽃 같은 처연하고 애잔한 사연들이다. 대체로 외딴섬에 사는 중년 남녀가 주인공인 탓일 수도 있겠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섬에서 온갖 종류의 일에 두루 능력을 보여 맥가이버로 불리는 남자. 그는 지갑 속 석장의 사진과 사진 뒷면에 적힌 이런 말들로 자신의 연애사를 간직한다. ‘갔다 올게’, ‘이런 사람이 있다고 엄마한테 말하고 올게’, ‘금방 올게’. 해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은 스무살 어린 신부, 10년 가까운 방황 끝에 정착한 섬에서 만나 새 출발을 다짐했으나 역시 죽음으로 불발 된 술집 여자,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에 만나 마음과 함께 돈까지 주었으나 결국은 이웃 사내의 품에 안겨버린 식당 여자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들을 사진 뒷면에 적어두었던 것. 여기에다가 빚을 대신 갚아주고 데려와 살았으나 보름 만에 도망쳐버린 최근의 또 다른 술집 여자까지, 그 남자의 연애사는 불행과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무리가 아주 쓸쓸하지는 않다. 아니 불사(不死)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오히려 씩씩하다.
“숱한 이동과 이별의 마침표를 찍어줄 인연 하나가 바다 위 널빤지처럼 저만치에서 떠내려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오늘 많이 불었다고 해서 내일 바람이 안 부는 건 아닌 것처럼, 수많은 파도가 밀려와도 꼭 그 다음 파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년들의 ‘시든 가을꽃’ 같은 이야기들 <그 남자의 연애사>와 비슷하게 실패한 연애의 역사를 더듬은 <그 악사(樂士)의 연애사>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반면, 마찬가지로 연작 형식 제목을 지닌 <그 여자의 연애사>는 다소 해학적이다. “이 이야기는 새벽 네 시 십칠 분, 대문 앞에서 부부가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목격한 것은 자정 무렵. 포장마차를 하는 아내는 어선 선장과 술을 마시는 중이었고, 남편은 늙수그레한 여자 관광객 두엇과 가이드 노릇을 하는 동네 후배와 함께 노래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그놈이랑 뭔 짓을 한 거야?”라고 남편은 아내를 닦달하는데, 선장과 열락의 시간을 보내고 온 아내는 시종수세에 몰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반격을 가한다. “솔직히 말해. 이 시간까지 그 관광객 여자들이랑 뭐 했어?” <애생은 이렇게>의 주인공은 ‘애생’(愛生)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의 여인이지만, 정작 사랑의 삶을 사는것은 연하의 남편이다.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에게 한눈을 파는 까닭을 묻는 애생에게 그가 한 대답이 걸작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아마도 여자들이 모두 거기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겠지 뭐.” 결혼 전 애생의 요구에 마지못해 읽었던 <어린 왕자>를 요령껏 패러디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 남편이 최근 목매달고 있는 단란주점 아가씨를 손수 불러서 남편과 놀게 해주는 애생의 배포는 그에 대한 포상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