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특유의 여로 형식과 시적인 문장을 통해 인간 존재의 거처를 집요하게 탐색해온 작가 윤대녕. 일곱번째 소설집은 윤대녕 소설세계의 연속성과 함께 그가 새로운 소설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책에 실린 일곱 단편 중 <구제역들>과 <검역>을 제한 나머지 다섯 작품에 서 과거는 빚쟁이처럼 주인공들을 쫓아다니며 채무 변제를 요구한다.‘육 년 전에 한 약속 잊지 않았겠죠? 오늘밤 자정에 거기서 만나요.’
<문어와 만날 때까지>의 주인공 ‘나’에게 온 요령부득의 문자 메시지가 시사적이다. 주인공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은 6년 전의 약속이 지금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알 수 없는 약속에 발목이 잡힌 그의 처지인 즉 삼척 바닷가에서 문어 삶아놓고 기다리겠노라는 대학 동창의 전화에 응해 동해로 달려가는 중. 계부와의 관계를 포함해 자신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숨기고 있는 아내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심사가 그의 등을 떠밀기도 했던 터였다. 저녁에 도착한 바닷가에서 밤새 동창과 어지러운 술자리를 이어가던 중 그는 마침내 ‘육 년 전 약속’의 정체와 상대를 떠올리지만, 약속을 지키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시각.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망각과 회상이 교차하던 어느 순간 그는 이런 상념을 곱씹는 것인데, 적어도 소설 속에서 그가 잃어버린 세계와 조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윤대녕 존재론’의 중간 결산 <문어와 만날 때까지>에서 보듯 방기된 과거는 정체성의 약화와 관계의 훼손을 초래한다. 치명적인 질병을 핑계로 사랑하는 여인 ‘숙’으로부터 도망쳤던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 ‘백’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자신의 지난 선택을 후회하며 끊긴 관계를 되살리려 하지만, 이번에는 숙 쪽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린다. “더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다면 과거의 기억이라도 복원하고 싶다”며 숙과의 추억이 깃든 홍콩의 이곳저곳을 되밟는 그의 행로는 방기했던 과거와 화해하고자 하는 속죄와 재생의 순례라 할 수 있다.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은 여정의 끝에 결국 숙의 용서를 얻어내지만, 표제작 <도자기 박물관>의 주인공 사내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막혀 있다. 그가 용서를 빌어야 할 아내 영숙이 이미 땅속에 묻혀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트럭 행상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살림을 불릴 꿈을 꾸지만, 남편이 어울리지 않게도 ‘도자기 병’에 들려 방황하는 바람에 꿈을 포기해야 했고 그 여파로 아내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만다. 남편에게 남은 것은 몇점의 도자기와 돌이킬 수 없는 회한뿐. 일종의 예술가소설이라 할 이 작품에서 도자기라는 미적 대상이 후회와 반성이라는 사람의 도리 아래 굽히고 들어간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더이상 젊지 않은 작가의 연치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왔든 누구한테나 삶은 결국 꿈 같은 것이 아니었겠소?”불가마 앞에 쪼그려 앉은 그에게 그릇들은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야말로 연륜에서 우러난 지혜라 하겠는데, <반달>의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건네는 말 또한 방향은 달라도 같은 이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구한테나 고독이고 고통이겠지. (…) 그래도 아까 우리가 보았던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다 좋은 일 아니겠니?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바로 운명이고 숙명이란다.”
삶이란 한갓 꿈 같은 것일 뿐이지만, 하루 또 하루의 비루한 일상이 모여 이루는 게 저 이름도 거창한 운명이요 숙명이라는 것. 꿈이라 허망해하지 말 일이며, 운명 앞에 지레 주눅이 들지도 말자는 것. 윤대녕 존재론의 중간 결산을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