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품집에 실린 열한 편의 소설은, 작가(혹은 작중 화자)의 개입 없이 소설 속 인물들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엄마가, 누나가, 이모가, 들려주는 제 삶의 이야기들.
김연수의 다섯 번째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지난 소설집에 이어 압도적인 죽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표제작의 주인공인 이모는 한국과 미국에서 차례로 사랑했던 두 남자를 여읜 채 서귀포에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다. 얼핏 요해되지 않는 제목은 배우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 유부남이었던 영화감독과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서귀포 함석집 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를 가리킨다. “함석지붕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들 생의 빗소리는 라와 시를 거쳐 한 옥타브 위의 미와 솔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독의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함석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요란하거나 꼴사나운 소동도 없이 중국집에서 함께 밥을 먹은 뒤 이모는 감독을 떠나보냈고, 뱃속에 든 아이도 지운 뒤 미국으로 건너가 새 삶을 살았던 것.“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건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이모는 화자인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이모는 불행한 것일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이모가 사랑했던 감독의 아들은 그 자신 영화감독이 되어 이모를 찾아온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은 오래전 서귀포에서 이모를 만나 짬뽕을 먹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먹는 내내 선생님 정수리께를 보는데,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어떤 슬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렇다면 이모의 사랑은 아주 죽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압도적인 죽음의 풍경 묘사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라는, 역시 요령부득인 제목의 소설에서 화자는 안산의 어느 터널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큰누나의 주장에 따라 주말 심야의 터널을 네 번 통과한다. 큰누나가 터널에서 들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주쌩뚜디피니’이거니와, 은희가 번안해 불렀던 프랑스 노래 <쌍뚜아마미>의 가사 ‘Je sais tout est fini’를 한글로 받아 적은 이 말에는 죽은 어머니의 회한이 어려 있다.
“인생을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자기도 그 언니처럼,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람처럼, 불어 노래도 부르고, 대학교 공부도 하고, 여러 번 연애도 하고, 멀리 외국도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말. 그 말.”200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역시 사랑하던 여자의 죽음과 그에 따른 고통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죽음에 관한 언급은 없이 “그 사건”이라는 표현이 정황을 대신할 따름이다. 사별의 아픔을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주인공은 친한 이들과 산책에 나 선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에, 그냥 걷는 일에 굶주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혼자서 걷기 시작해 사람들은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간다”는 것을.
우리, 함께 걸어요 소설집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덕수궁 주변 풍경을 그리면서 “모퉁이마다 무장을 한 전투경찰들이 모여 시위하고 있었다”고 쓰거나, 역시 같은 작품에서 하이네의 시구를 응용해 “물어뜯지만 않았어도! 물어뜯지만 않았어도!”라는 탄식을 내뱉을때 작가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주인공의 말마따나 누구에게나 고통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지만 그 개별적인 고통들의 배후에는 사회적 맥락과 의미망 역시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는 “함께 걷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