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겨울 달구벌 본영에서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둔 나를 불러 사단장이 훈시했다.
“아들아! 서울 가면 두 가지를 꼭 지켜라. 첫째 식욕이 없을 때는 영양의 균형을 위해 비빔밥을 사먹어라. 둘째 사리분별이 안 되는 일을 만나면 사람 많은 줄 뒤편에 서거라.”
나는 이 두 가지 주문 중 첫 번째 주문은 미심쩍었고, 두 번째 주문은 못마땅했다. 그래도 부하의 도리를 다해 첫 번째 주문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작심하고 서울로 왔다.
82년 서울의 봄은 언제나 교정에 최루탄 입자가 눈처럼 흩날렸다. 강의실은 한산했지만 학교 앞의 막걸리집은 색깔 다른 말들로 늘 소란스러웠다. 술잔이 날아가고, 병이 깨지고, 비수 같은 말들이 오가고…. 아침이면 밀주의 숙취가 머리통을 술판처럼 혼란스럽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아침마다 국물, 국물, 국물을 찾아야 했다. 비빔밥의 나물로 영양 불균형을 우회통과하라는 사단장의 지시는 아득해졌다. 군자금이 올라올 때 한꺼번에 몰아서 도가니탕이나 꼬리곰탕으로 정면돌파하는 전략으로 나는 명령을 거역했다. 사단장의 훈시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잊혀졌다.
하지만 사단장은 위대했다. 인간을 지배하려면 공포와 수치를 장악해야 한다는 통치의 공리를 통찰했음일까? 82년의 어느날 나는 <애마부인>을 상영하는 극장 매표구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뒤편에 서 있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서 십수만의 관객이 이미 안소영을 보고 간 시점이었다. 이런 시국에 저걸 봐, 말아 하고 망설이는 포즈를 취하다 그제야 사람 많은 줄 뒤편에 슬쩍 붙은 꼴이었다. 그러니 ‘사람 없는 줄의 앞’과 ‘사람 많은 줄의 뒤’를 이항대립시킨 사단장의 수사의 정치는 그 의미론적 적실성을 판별할 수 없는 노예의 공포에 어김없이 작용했던 셈이다.
대학 입학하던 해에 안소영이 타고 왔던 애마를 이듬해에는 오수비가 몰고 왔다. 나는 다시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좀 앞줄에 섰다. 동행도 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몇달을 감옥에 있다가 출소한 친구와 같이 갔다. 영화를 보자고 제의한 건 나였지만 <애마부인>을 강력히 우긴 것은 그 친구였다. 물론 나의 의지도 그와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우리는 좀 머쓱했다. 종로의 학사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평소보다 속도가 좀 빨라 일찍 취했다. 그때 우리는 지성파 애마로 홍보된 오수비 얘기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애마는 줄기차게 나타났다. 백마도 있었고 흑마도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은 누가 마부가 되느냐에 쏠려 있었다. 해외여행이 통제되던 시절 <파리애마> 유혜리는 관객을 파리의 뒷골목까지 데려가 넋을 빼놓았다. 이국적인 용모와 건장한 신체로 금발의 남성과 대등한 연기를 펼쳤던 <짚시애마> 이화란은 아시아의 남성성에 한방 먹이며 관객의 콧구멍에서 긴긴 한숨이 새어나오도록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종마로 분류되는 애마의 계보다. 이후 퇴마가 된 애마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는 <짚시애마>를 마지막으로 입대했고 애마와의 인연도 끝이었다.
3년 전 멜로드라마 관련 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뒤적거리는데 애마와 관련된 대목이 있었다. 한국 멜로드라마를 시대상과 연관지어 그 사회적 의미를 자리매김하는 논문이었는데, 거기에 애마는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불기 시작한 성개방 바람의 첨병’으로 정리돼 있었다. 성개방의 표면적 논리 아래 여성육체를 볼거리로 전시하면서 군사주의의 근육질을 투사시킨 이미지가 애마라는 것이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애마의 역사를 이 논법에 따라 정리했다. 하지만 산 자가 죽은 자의 기억을 불러내 가지치기한 역사보다 산 자의 기억은 좀더 사연이 많은 법이다. 나는 자문해본다. 그때 애마는 무엇이었을까?
애마는 그때까지 세미 포르노 한편 못 본 내게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포르노였다. 또 랭보의 시집을 끼고 다니며 폼잡던 내게 프랑스의 뒷골목을 보여주기도 한 취향의 동조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간혹은 감옥에 간 자와 안 간 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불편함을 지워주는 윤활유 역할도 했다. 적어도 그때, 애마는 최루탄 소리와 정치담론에 짓눌려 정서적 영양불균형 상태에 빠져 있던 젊음에 개인적인 욕망과 허영의 숨통을 틔워준 비빔밥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비록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남성주의에 오염된 불량식품이라 할지라도.
얼마 전 개 먹지 말라던 브리지트 바르도 할머니를 보면서 애마의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가슴이 만월이어서 영향력도 만월인 생을 구가한 서양배우와 가슴이 만월이어서 졸지에 토사구팽당한 한국배우들이 대비됐다. 오수비나 이화란은 처음부터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을까? 아니면 한번 전시된 육체에는 다시는 사랑이라는 치장을 걸칠 자격을 박탈하는 우리 안의 아버지의 계율 때문이었을까? 애마는 우리가, 우리의 육체가 기억을 배신하는 그 자리에 화석으로 묻혀 있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신문방송학) ▶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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