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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촬영현장
2002-02-06

역사는 피를 먹고 흘러가네

간다. 개화파 선비와 풍운아 화가가 수레에 차가운 시신을 싣고 바람찬 강둑길을 따라간다. 덜컹덜컹 무심하게 굴러가는 수레바퀴처럼 역사가 깊은 굴곡에 요동치던 1866년, 천주교 신도 8천명이 살해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지난 1월 말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시간을 거슬러찾아간 현장도 바로 수많은 천주교도가 참수당한 형장이었다.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고, 목없는 시체들이 꽉 들어찬 구덩이가 깊게 팬 현장은 을씨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영화에선 초반부에 해당하는 이날 촬영분은 김병문(안성기)이 개화파 동료의 시신을 찾는 와중에, 스스로 ‘천주쟁이’라 밝힌 기생 매향(유호정)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걱정된 주인공 장승업(최민식)이 시체더미를 뒤지는 장면. 이제 마지막 촬영만을 남긴 여유였을까. 무겁게 느껴졌던 촬영장은, 막상 임 감독이 사인을 보내기만 하면 가뿐하게 움직였다. 결국 이날의 촬영은 리테이크도 거의 없이 물 흐르듯 끝을 맺었다. <취화선>은 후반작업을 거쳐 5월 개봉할 예정이다. 글 문석·사진 손홍주

1. “여기말고 형장이 또 어디에 있소?”, “서대문 밖에도 있으니 한번 가보슈.” 처참하게 늘어선 시체를 보고 난 장승업은 매향이 희생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가누지 못한다.

2. 김병문은 동료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 갑갑한 신분사회를 천주의 힘으로 깨보겠다던 꿈은 어디에 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가셨는가”라며 한탄을 내뱉는다.

3. 영화에서 한강변으로 설정된 곳은 충남 서산, 한 기업인이 뚝심으로 바다를 땅으로 메웠다는 간척지 인근이었다. 탁 트인 바다도 현장의 우울한 분위기를 온전히 감싸진 못했다.

4. 목 잘린 마네킹이 가득한 시체구덩이 속에는 사실감을 위해 엑스트라들이 들어가 졸지에 ‘산 송장’ 신세가 돼야 했다.

5. 현장에서 만난 임권택 감독은 사무실에서 시나리오를 만질 때보다 훨씬 생기에 찬 모습이었다. 비슷한 연배인 정성일 촬영감독, 이태원 태흥영화 사장 또한 현장에선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