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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배려가 아름다워
2001-03-13

컴퓨터 게임/ 게임 시스템

어떤 게임이 좋은 게임인지 말하기는 쉽다. 감동적인 줄거리에 충실한 시스템, 화려한 그래픽에 뛰어난 인공지능 등, 좋은 게임이 갖춰야 할 조건은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좋은 게임을 만들기는 어렵다. 반면, 나쁜 게임을 만드는 건 아주 쉽다. 철저하게 제작자 위주의 마인드를 유지하면 굳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쁜 게임이 만들어진다.

롤 플레잉 게임을 하다보면 쇼핑을 해야 할 일이 자주 생긴다. 열심히 몬스터를 때려잡아 푼푼이 모은 돈으로 길양식을 장만하고 칼도 새 것으로 개비한다. 현실과는 달리 다리품을 팔 필요도 없다. 그런데 가끔 불친절한 상점이 있다. 이름만 덩그러니 있을 뿐, 상품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체력을 회복하는 약인지, 아니면 해독제인지 사서 생체 실험을 해보기 전엔 알 수 없고, 기껏 산 갑옷을 우리 팀원 중 아무도 입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게임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아이템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시시콜콜 설명을 해줘서 가격 대비 경쟁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게임이 아쉽다.

또 롤 플레잉 게임 얘긴데, 게임 플레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건 전투다. 그러니 전투가 지루한데도 재미있는 롤 플레잉 게임은 별로 없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있는 전투라도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면 지겨워진다. 적이 너무 약해서 아무런 긴장도 없다면 더욱 그렇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2, 3초에 한번씩 전투가 일어나는 게임이 생각보다 많다. 이런 게임을 보면 베타 테스트란 걸 과연 하기는 했는지, 했다면 왜 했는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적과의 조우율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아예 전투를 회피할 수 있는 아이템도 있으면 좋다. <마더2>처럼 레벨 차이가 너무 나는 적과 마주치면 전투를 생략하고 경험치만 얻는 시스템이 왜 다른 게임에는 도입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불평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수시로 여관을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여관은 거친 싸움으로 소모된 체력과 마력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장소다. 그런 중요한 곳을 마을 입구에서 제일 먼 구석, 그것도 이층에 마련해 놓은 희한한 게임이 있었다. 이런 게임일수록 마을은 엄청나게 넓은 건 물론이다. 사람들이 너무 빨리 움직여서 말 한번 걸어보려면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마우스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게임이 있다. 대화가 슈팅 게임이다.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이벤트 아이템을 내다팔 수 있게 해놓아서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로드를 해야 하는 게임이 있다. 이쯤 되면 사실 ‘사소한’ 것도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좋은 게임을 만들기는 어렵다. 애당초 싹이 노란 게임도 있지만, 열정과 재능과 성의가 있어도 돈이나 기술의 벽 아래에서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게임은 안타깝지만 화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조그마한 것들, 많은 돈도 첨단 기술도 필요하지 않은, 순수한 배려가 부족해서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적지않은 돈을 쏟아부은 ‘대작’ 주제에 그러면 실망은 분노로 바뀐다.

사소한 배려는 인생을 윤택하게 만든다. 너무 사소해서 당연한 걸로 여기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때의 낭패감은 웬만한 재난영화 못지 않다. 아름다운 그래픽과 공들인 시스템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거기 쏟아부은 노력은 허무하게 잊혀진다. 마침 일진이 안 좋은 날이라면, CD가 두 조각이 나거나 애꿎은 PC가 분풀이를 당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