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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4] - 이동진 ①

중독증인 기자 이동진의 설경구 관찰기

난 그를 축복하고 저주했다 <박하사탕>

솔직히, 나는 설경구를 썩 잘 알진 못한다. 지난 6년간 영화 담당 기자였건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와는 단 한 차례도 정식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고도 별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는 배우들도 숱한 반면, 설경구는 알아갈수록 호감이 더해가는 사람이다. <씨네21> 기자가 <박하사탕>과 관련해 두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기사 첫줄이 “아직도 궁금한 것 있으세요”란 그의 말이었지만, 내겐 열 차례쯤 인터뷰를 하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어차피 설경구와 김영호(<박하사탕> 주인공)가 오래도록 서로에게 양화(陽畵)와 음화(陰畵)가 되리란 걸 부정할 순 없다. 설경구에 대한 개인적 인상기에서 <박하사탕> 얘기가 빠질 수도 없다. 그는 <박하사탕> 촬영 초반에 결말부터 찍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이해도 못한 채 연기를 시작했다가 점차 과거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인물에 빠져들 수 있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아예 설경구에 대한 기억의 편린을 7개 에피소드가 시간 역순으로 진행되는 <박하사탕>식으로 되살려보면 어떨까. 내게 설경구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2002년 1월- 설경구는 설경구스럽다

지금 생각해보니, 설경구는 정말 설경구스럽다. 하나마나한 말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이 그대로 부메랑처럼 형용사로 쓰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어반복 문장은 항상 참인 명제가 된다. <박하사탕>에서 <공공의 적>까지 봐온 나는, 이제 동어반복적 문장으로 그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픈 마음이 된다. 때론 그냥 편들고 싶은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설경구라는 ‘고향 내음 가득한’ 본명(경구씨, 죄송합니다)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 설경구스럽고, 일산에 산다는 것(<초록물고기> 분위기로!)이 그러하며,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기를 가장 즐기는 음주 취향도 그렇다. 마이크라도 잡으면 그 ‘70년대적인’ 목소리로 애절하게 불러젖히는 김광석 노래들은 또 어떤가. 과언(寡言)에 눌변(訥辯) 같은 어투 속에 올올이 들어찬 진심으로 결국 신뢰를 주는 화술도 마찬가지. 설경구라는 이름을 ‘한미르’의 전화번호부에서 검색해봤다. 단 두명(한명이 더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도 과연 설경구스러울까)밖에 없었다(안성기는 277명, 최민식은 133명, 한석규는 62명, 박중훈은 37명, 송강호는 29명이었다.).

일산에서 명동까지 모래주머니를 찬 채 걸어다녀도, <공공의 적>과 <오아시스>를 위해 고무줄처럼 수십㎏의 체중을 가배얍게 늘였다 줄여도, 그의 핵심을 ‘설경구스러움’으로 파악한 내겐 그런 ‘묘기대행진’이 더이상 놀랍지 않다. 꾸밀 줄 모르고, 돌려 말할 줄 모르고, 눙칠 줄 모르고, 토크쇼에서 영 어색하기까지 한 그는 그 설경구스러움으로 처음엔 쉽사리 접근을 허용치 않지만,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심히 노크하면 이내 강력한 인력으로 와락 끌어안아버린다.

2001년 12월- 나는 2년도 참을 필요가 없었다

종로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설경구와 한잔하게 됐다. 3차까지 이어진 그날 술자리에서 기분 좋게 취한 그는 어린아이 같은 어투로 말했다. “난 걱정 안 해. 동진형(장난삼아 그렇게 불렀다)이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박하사탕>을 본 직후 설경구란 배우로부터 거대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무도 물어본 사람은 없었지만) ‘설경구가 향후 10년간은 <박하사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전 어느 자리에선가 그 이야기를 설경구에게 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래, 기자가 하는 말을 그냥 믿었단 말이죠?” 피식 웃으며 응수했지만, 이미 난 그때의 내 생각이 ‘오버’였다는 판단을 내린 뒤였다.

<공공의 적>에서 그는 정말 감탄스러웠다. 어떤 면에선 그 연기가 <박하사탕>보다 나은 점도 없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의 설경구 연기에선 강박과 독기가 없다. 대신 캐릭터와 마주보고 서서 웃을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냈다. 설경구와 한 덩어리였던 김영호와는 달리, 강철중(<공공의 적> 주인공)은 설경구와 영화 곳곳에서 ‘따로 또 같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인물을 그대로 살아버렸던 <박하사탕>에서와 달리, 설경구는 <공공의 적>에서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연기’를 하면서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어쩌면 그의 ‘연기자’로서의 경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경구는 <박하사탕>의 전율을 일으키는 연기가, 백조가 마지막 순간 단 한번 부르고 죽는다는 ‘스완 송’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혼자 속으로 북치고 장구치던 나는 채 2년도 참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그가 나중에 합류한, 대학 동기이며 친구인 김상진 감독에게 참 무작스럽게도 대꾸하고 있었다. 우정에 바탕한 둘 사이의 묘한 설전에 담긴 그 ‘타협없는 설경구스러움’을 지켜보며 히죽대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술집엔 우리밖에 없었다.

2001년 11월- <공공의 적>, 놀라움의 한가운데 그가 있다

<공공의 적>을 우연찮게도 편집실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지극히 낯익은 조합들만으로도 대단한 대중적 파괴력을 과시한 그 장르영화는 만든 이의 더이상 익숙할 수 없는 ‘손’과 톱니바퀴 하나 놓치지 않고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머리’가 돋보이는 유쾌한 오락영화였다. 그리고 그 놀라움의 한가운데엔 설경구가 있었다. 이 영화로 마침내 그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간 우리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잘못 알고 있었던 그는 사실 ‘외계에서 온 괴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그가 등장하는 첫 시퀀스를 보며 조마조마했다. 동료 형사가 차 안에서 권총 자살한 직후 강철중이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전혀 다른 색깔이어야 할 이 캐릭터가 김영호의 쌍둥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바로 다음 장면, 3류 깡패를 격퇴하는 목욕탕 신에서 살찌워 불룩 처진 그의 아랫배와 꼭꼭 씹어 낮게 뱉어내는 대사와 세상만사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표정은 그런 의심을 일순 잠재웠다. 그 장면 이후론 난 이 영화에서 김영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 하비 카이틀(<배드 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더티 하리>), 멜 깁슨(<리쎌 웨폰>)과 김영호의 모습이 조금씩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 결국 설경구는 강철중을 이제껏 우리가 한번도 본 적 없었던 매력적인 형사 캐릭터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그는 이 영화로 연기 이력에서 두 번째 매듭을 지었다. 이 ‘외계에서 온 괴물’은 다음에 또 어떤 특수분장으로 ‘연기 잘하는 배우’ 흉내를 낼 것인가. 설렐 수 있을 때, 기다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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