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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5] - 이동진 ②

난 그를 축복하고 저주했다

2001년 4월- “이창동 감독하고는 무조건 할거예요”

<파이란>으로 깊은 감동을 받아 최민식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직후 ‘우발적으로’ 술잔을 나누던 자리에 송강호와 설경구가 합류했다. 내게 설경구와 최민식이 함께한 그 자리는 절묘했다. <박하사탕>과 <파이란>은 각각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내가 본 가장 훌륭한 영화였고, 두 영화에서의 설경구와 최민식은 각각 그해 최고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취한 상태로 휴대폰을 꺼내 이창동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통화는 마치 연인들의 것인 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흘러 넘쳤다. 이창동 감독도 대종상을 받을 때 거의 아내에게 할 법한 애정표현을 배우들에게 퍼붓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긴, <박하사탕>을 통해 서로의 작업에 대해 (‘知音’이란 말을 낳은) 백아와 종자기의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이니, 그럴 법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유심히 쳐다보는 내게 그는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이창동 감독하고는 (어떤 작품이든) 무조건 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시나리오에서 제작사 배급사 공연배우까지 다 따져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저렇게 순진하다니. 쯧쯧, 혀를 차고 싶었지만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미소였다. 그는 그날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박하사탕> 중독 환자”라고 했지만, 금단증세를 보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연히도!) 설경구였다.

노래방까지 간 자리에서 설경구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는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미성이었고, 힘있는 창법이었으며, 진실이 담겨 있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 영화가 담겼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가 바로 옆에 구부정하게 서서 가장 선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0년 11월- 알몸뚱이의 <박하사탕>에서, 하나씩 옷을 입어가며

<단적비연수>는 실망스러웠다. 관객은 스토리조차 이해되지 않아 심드렁한데, 스크린 속 캐릭터들의 입가에서만 ‘신화적인 사랑’이 절규로 맴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열연하는’ 설경구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그림 같았다. 설경구에게 이 영화는 송강호에게 있어서의 <쉬리> 같은 작품이 되는 걸까. 개봉을 전후한 인터뷰들에서 설경구는 계속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로 스스로에게 쐐기를 박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쉬리>가 송강호에게 결국 ‘쓰지만 좋은’ 약이 됐듯, <단적비연수> 역시 설경구에게 재도약 발판이 됐다. 삶엔 액땜이 없지만, 경력엔 분명 액땜이 있다. <박하사탕> 같은 걸작을 찍고 나서 더 긴 시간을 웅크리고 있었더라면, 그는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 훨씬 더 값비싼 부적응의 대가를 치렀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달이 채 되지 않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로맨틱코미디까지 내놓은 그는 결국 예전 유영길 촬영감독의 “설경구는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는 평을 ‘자기충족적 예언’처럼 직접 증명해냈다.

설경구는 사실 대부분의 다른 배우들과 정반대로, <박하사탕>을 통해 나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처음 관객과 대면하는 의식을 치렀다(<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송어>까지 이전에도 ‘설경구의 영화’는 여러 편 있었지만, <박하사탕> 전엔 ‘설경구’는 없었다). 그의 ‘원초적인 알몸’을 기억했던 관객은 이제 그가 하나씩 옷을 입어가며 만들어내는 다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본다. 세월이 흘러 그가 대충 옷을 다 챙겨 입으면 어떻게 될까. <박하사탕>에서처럼 그가 모든 것을 벗어젖힌 모습과 언젠가 다시 한번쯤 더 조우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1999년 12월- ‘김영호’와의 첫 만남

설경구를 처음 만났다. 굵은 뿔테안경의 각진 얼굴에 접하는 순간 설경구인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박하사탕> 개봉을 앞두고 열린 ‘특별 시사회’였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초청된 그 자리에선 상영 뒤 간단한 간담회가 열렸다. 난 그 자리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네번이나 거듭 볼 정도로 <박하사탕>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당시 나는 무대 위에서 발제가 아니라 거의 연애편지 낭송 같은 톤으로 관객을 향해 내 사랑을 호소했다. 도중 옆자리 설경구를 가끔씩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내 아무 표정도 없었다. 간담회 뒤 무대 위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순간에도 그는 악수를 청하는 내게 눈조차 맞추지 않았다.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차가운 악수 뒤 돌아서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는 설경구가 아니었다. 촬영을 마친 지 오래였지만, 너무 깊게 인물에 빠져 상대 배우를 내던지거나 철교 위에서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던 그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김.영.호.였던 것이다.

1999년 10월- ‘강철 같은 배우’를 발견하다

아주 이따금씩 영화를 보다보면 배우가 눈동자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순간을 만난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심드렁하게 발길질하는 장면에서 내 망막 속에 박혔다. 그 무감각하면서 황폐한 내면의 사막은, 철길에 뛰어든 채 내지르는 첫 에피소드의 절규보다 훨씬 더 쓸쓸하고 슬펐다. 가장 독특한 이름 ‘설경구’가 가장 흔한 이름 ‘김영호’(위의 한미르 전화번호로 그 이름을 검색해보니 무려 5750명이나 됐다)를 만나 펼쳐지는 데칼코마니 속에서 나는 내 무의식 속의 무인도를 보고야 말았다. ‘박사모’(<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사상 유례없었던 커뮤니티 결성은 그런 무인도 사이사이에 물길을 내려는 몸부림들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순수의 눈물 한 줄기를 흘릴 때, 그 눈물 속에 소금기 대신 담긴 절망(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스무살 시절로의 그 긴 여행을 결국 슬픈 판타지로 만들어버리는)을 확인하며, 기이하게도 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때론 절망도 안온하고 편안하다.

극장을 나서며 난 설경구를 축복했고 저주했다. 그에게 이 영화는 아마도 영광이자 족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나약해보이는 배우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소설가 이승우에게 했던 ‘강철 같은 작가’란 표현은 그대로 그에게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는 ‘강철 같은 배우’였던 것이다(소설가 신경숙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에필로그>

기자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취재 대상들과 세월을 함께 먹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이다. 배우로는 나와 동갑내기(음력으로 따질 때)인 설경구와 송강호(그러고보니 이상하게도 송강호와도 정식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가 그렇다. 함께 늙어간다는 느낌은 <박하사탕> 라스트신처럼, 때론 그 세월의 무게에 한숨이 나오지만, 더없이 편안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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