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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6] - 최보은
2002-02-01

`아줌마 팬` 최보은이 설경구에게 바치는 연서

그와 사진을 찍었다, 야호!

자랄 때 나는 스타에 열광하지 않았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다. 떡볶이와 맛탕이 영혼의 양식이던 중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이 어니언스나 윤형주, 송창식에 뿅 가 있을 때, 나는 별것도 아닌 내 영유년의 상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피학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거른 끼니는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때우는 법이다.

삼십대 중반에 영화잡지사 기자라는 명함으로 영화와 때늦은 인연을 맺고, 사십대 초반에 영화잡지사 편집장이라는, 자질에 비해 엄청 때깔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뒤늦게 ‘열광’이 가져다주는 치유효과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열광은, 처음에는 아마 산전수전에 찌들어온 아줌마답게 얄궂고 얄팍한 호기심의 형태였던 것 같다. 그들은 실존에 덧씌워진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존재와 아우라의 충돌이 빚어내는 분열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그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래서 후배들의 일거리를 가로채서 스타 인터뷰를 자청하곤 했는데, 스타들은 동물적인 후각으로 그런 호기심을 읽어내곤 방어막을 쳤다. 아니 보통사람이라도, 그런 태도 앞에선 짜증을 내고야 말 것이다. 그들 폐부를 뚫고 들어가보겠다는 내 과욕은 번번이 실패했고, 그들 중 몇몇은 별 이상한 아줌마 다봤네 하는 표정으로 “톱스타는 호르몬을 어떻게 해결하지?”와 같은 내 괴상한 질문들을 묵살했다.

불감증의 둑이 무너지다

평생 자의식 과잉의 질병을 앓아온 내가 내 마음속 스타의 자리에서 ‘가시면류관 쓴 나’를 밀어내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그건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영화관람이 ‘프티 부르주아의 할랑한 소일거리’라는 도그마의 반복적 세뇌 속에 이십대를 통과해온 내가 살아숨쉬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됐을 즈음, 어느날 갑자기 나는 스크린 속에서 열광의 대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열광한다는 것은, 대상을 향한 오마주이기보다 자신의 취향을 긍정하고 실존을 향유하는 삶의 자세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열광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한번 불감증의 둑이 무너지자, <넘버.3>의 불사파 두목 송강호, 깡패검사 최민식, 순진한 간첩 유오성, 장의사 아들 장동건 등의 리스트가 속속 작성됐고, 그들에 대한 내 때늦은 사랑은 공사의 구별없이 지면을 통해 공표되곤 했다. 송강호씨에겐 ‘그네에서 만나자’는 후안무치한 연서를 띄웠고, 최민식씨에 반해 <파이란> 보기를 선동했다.

두해 전인가에는 <씨네21> 송년회에 참석한 그들의 팔짱을 끼고 함께 사진 찍히기를 강요하기까지 했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온 소설가 김영하씨가 기꺼이 아줌마의 속물근성을 만족시켜줄 ‘찍사’ 역할을 맡았고, 나중에 이메일로 최민식씨와 어깨동무를 한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사진 속의 헤벌쭉한 아줌마 표정은 당사자가 보아도 가관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드디어 불감증 탈출이라는데!

오래 참으셨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박하사탕>으로 드디어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설경구씨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먹물들이 너나없이 침튀기며 칭찬하는 데 괜한 반감을 가졌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영화보기를 기피하고 있었고, 따라서 설경구씨에 대해 이렇다 할 소견이 없었다. 그날 설경구씨는 송강호씨와 함께 새벽 네시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끝까지 지켰지만, 나는 까만 뿔테안경 너머 그의 눈빛이 조금 시니컬하다는 인상을 안고, 일 밀리미터(????)도 그와 가까워지지 못한 채 다시 스타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일상으로 튕겨져나왔다. <박하사탕>은 그뒤 비디오로 보고, TV영화로 한번 더 본 뒤, 이창동 감독을 내 열광의 리스트에 등재하는 계기로 삼았을 뿐이다. 설경구씨와 재회한 것은, 그러니까 이 기획의 계기가 되었을 <공공의 적> 화면에서였다.

영화 속의 그는 다 알려졌다시피 피둥피둥하고 지저분하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꼴마초였다. 그러나 말없고 무뚝뚝하고 따라서 이 사회의 눈에 아주 그럴듯해보이는 꼴마초와 두번씩이나 결혼해본 아줌마가 그런 인종이 주류인 이 사회에서 또다시 결혼상대를 고르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문제될 건 전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가 있지? 저사람, 위장 속의 난로에 화력 좋은 갈탄이라도 때고 있었던 건가? 팍팍하고 건조한 외피 속 어디에 그 뜨거운 피 흐르는 혈관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지? 영화월간지 편집장의 신분으로 시네마서비스의 회의실 영사막에 어리는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 화면을 보는 동안, 나는 이미 직무를 빙자해서라도 그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허문영 편집장, 우리 잡지 선전 좀 해도 되죠?) 그래서 지금쯤 서점에 깔렸을 <프리미어> 2월호에 열두쪽짜리 설경구 인터뷰가 실리게 된 것이다.

위장 속 난로에 갈탄이라도 땐 거야?

매운 바람 부는 날, 허리우드극장 앞에서 인터뷰하는 기자를 따라 그와 만났을 때, 2년 전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뿔테안경이 사라진, 마른 그의 얼굴에는 뜻밖의 여유가 서려 있었고, “넌 또 무슨 밥맛없는 고참기자 나부랭이야?” 하는 듯 경계심 어렸던 표정은 지난 달력과 함께 폐기처분돼 있었다. 아마, 그는 나를 만났던 사실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보다, 그런 자의식이 필요없을 만큼 스스로 충족한 상태였으리라.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대학 이전의 자신에 대해 ‘별 볼일 없었던 애’라고 표현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뷰티풀 마인드>의 소재가 된 천재수학자 존 포브스 내시 주니어의 전기 <아름다운 정신>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대학 시절은, 많은 미운 오리새끼들이 자신이 백조임을 자각하는 때이다.” 너무 맘에 들어서 <프리미어> 인터뷰에도 써먹었지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설경구는 대학 시절 연극을 통해 자신의 출신성분을 이미 확인한 백조였다.그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의 시간을 좀더 많이 빼앗으려 무지 로비를 했다. 물경 열두쪽짜리 인터뷰를 하려면, 한두 시간 만나서는 안 된다고 협박했다. 게다가 <오아시스> 출연 때문에 절식중인 그를 술마시자고 꼬드겼고, 심지어 그날 저녁 예정된 형사대상 시사회에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무슨 범죄사실을 자백받으려는 형사처럼, 술고문을 해서라도 방어기제를 녹여서 ‘인간 설경구’의 예술적 범죄사실 전모를, 그 정신적 누드를 소개하겠다고 야심차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만큼, 그의 입은 순조롭게 열렸다. 강권하지 않아도 안주없이 맥주를 들이켰고, 적당한 때가 되자 물을 청해 체내 알코올 성분을 희석해 가면서, 일초도 권태로운 표정없이 문답문답의 식순을 소화해냈다. 그렇게 한 것은, “이 기사를 읽고 한명이라도 더 영화를 보러 와준다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그와의 대화를 녹취했을 때, 그 분량은 별책부록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는 “시사회 끝나고 다시 오라”는 유혹을 미소로 넘기고, 아마도 기자를 빙자한 아줌마 팬의 존재는 또다시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 채, 경찰대상 시사회로 갔고, 무대 위에서 진짜 형사들과 악수를 나눈 뒤 <오아시스>로 갔다. 그는 영화에서 인생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오아시스에 오래 머물길 빈다. 그리고 한국영화가 고베의 대지처럼 한순간 주저앉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나는 나대로 뒤늦게 발견한 팬덤의 오아시스에 당분간 머물 작정이다. 그날 나는 또다시 디지털카메라로 그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나도 낯간지럽지 않았다. 당대의 배우와 기념사진 찍을 기회가 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아줌마를 미워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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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보은/ <프리미어> 편집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