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선 기차와 그 역들을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세 인물의 코믹액션을 그리는 <라이터를 켜라>는 명실상부한 ‘기차’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공개된 촬영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동차의 도시 울산. 발길 뜸한 울산의 기차역에서 이 ‘기차’ 영화의 촬영은 새벽이 오도록 계속됐다. 선거운동해준 돈을 받아내려고 국회의원(박영규)을 쫓는 깡패(차승원)와 300원짜리 라이터를 되찾으려고 그 깡패를 쫓는 예비군 백수(김승우)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 장항준 감독의 데뷔작. 촬영장에서 만난 장항준 감독은 개그맨 뺨치는 평소의 언변을 접고 과묵하게 현장을 통솔했으며, 그런 그를 두고 스탭들은 헐렁하지만 조여주는 ‘허리스마’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었다.
원래 ‘천안역’ 장면이기 때문에 표지판들을 천안으로 바꿔 붙인 뒤 진행된 이날의 촬영은 국회의원 박용갑이 부른 경찰들과 깡패 양철곤이 소집한 수하 깡패들이 천안역 플랫폼에서 한판 격돌하는 장면과 이 틈을 타 백수 허봉구가 철곤에게서 풀려나는 부분이었다. 극중 경찰과 깡패의 싸움은 경찰 대장과 깡패 두목이 서로 잘 아는 사인지라 ‘짜고 치는 고스톱’. 이게 경찰 엑스트라와 깡패 엑스트라들의 “형, 더 빨리 잡혀줘야지” 등등 ‘짜고 하는’ 연기와 맞물려, 촬영 자체가 하나의 유머를 자아냈다. 멋도 모르고 열차에 실려 플랫폼에 들어온 진짜 승객들은 황량한 울산역에 벌어지고 있는 진풍경에 웅성웅성하기도. “오케이!” 소리가 입에 딱 붙은 장항준 감독과 예비군복이 너무나 편해보인 김승우, 제일 그럴싸한 의상을 차려입은 차승원, 그리고 이문식, 강성진, 류해진, 이원종, 성지루, 배중식 등 쟁쟁한 조연들이 총출동한 이날의 <라이터를 켜라> 촬영은 카메라 안팎의 재미로 잠을 쫓기 충분한 것이었다.글 최수임·사진 정진환
(1) “저것들 뭐하는 거야?” “짭새 새끼들이 들이닥쳐서 우리 애들을 싸그리 잡고 있어.” 양철곤이 친구 만수(성지루)로부터 사태보고를 받고 놀라는 장면.
(2) 철곤을 도우러 온 깡패들과 국회의원 박용갑 편 경찰들의 오합지졸 몸싸움.
(3) ‘떠벌남’ 역 강성진이 촬영장에서 생일을 맞았다. 사실은 며칠 지났지만, 컷과 컷 사이, 짤막하게 스탭들이 열어준 생일파티는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오히려 늦길 잘했다.
(4) 배우들과 모니터를 지켜보며 이것저것 의견을 나누는 장항준 감독. 처음 반갑게 취재진들과 인사를 나누던 그는 일단 촬영이 시작되자 일에만 몰두했다.
(5) “누구도 내가 <신라의 달밤>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했고, 그런 게 나한테 맞았다. 포장되지 않은 투박한 보통사람. <라이터를 켜라>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잘하는 걸 하자, 하는 생각이다. ”- 차승원. “이미지 변신이라고? 아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케이프 피어>를 하면 이미지 변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난 아직 드 니로가 돼보지 못했다. 아직까지 배우로서 ‘내 것’이 없단 말이다. 근데 이번 역은 왠지 옷을 잘 입은 거 같다.”- 김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