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에게 시간은 돈이다. 그리고 돈은 곧 배우들이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시켜주는 연료다. 그 연료를 얼마만큼 알뜰하고 효과적으로 소비해나가는지, 여기 김영일의 하루 연료 사용내역이 상세히 펼쳐진다.
10:00 압구정 P어학원 305호- “I’m a drinking student”
“What do you think about her?” “어… 음… 쉬 이즈 베리 큐트….” 어쩐지 대화 도중 튀어나오는 ‘r’ 발음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그의 하루 일과는 영어학원에서 시작된다. 조카뻘 클래스메이트들에 둘러싸여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에게 올해 작은 소망이 있다면 “유창하진 않지만 기본적인 영어회화 실력”을 쌓는 것. “<공동경비구역 JSA>로 해외영화제에 나갔는데 다른 아시아쪽 매니저들은 외국영화사 담당자들과 ‘진짜 대화’를 나누더라고요. 결과적으로 비즈니스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은 죄다 한국인이야. 사실 장첸과 신하균의 차이가 뭐냐 이거죠. 부끄러운 걸 떠나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겨우 초급반 교재 로 시작하는 그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다른 학생들은 어제 저녁 뭐했나 물으면 PC방도 가고, 친구도 만났다는데, 난 매일 ‘drinking’이에요.” (웃음) 하지만 “영일은 수업태도도 출석률도 좋은, 굿 스튜던트!”라는 영어강사의 칭찬에 다시 한번 졸린 눈을 번쩍 떠본다.
11:00 압구정 수다 회의실- “당장 미용실을 바꿔줘”
“3호차는 정비들어가 있다고 했고, 4호차는 수리 끝났어?” 현장을 돌보는 로드매니저까지 쳐서 6명의 인원이 움직이는 이 팀의 회의는 비교적 간단하다. “미용실을 바꿨으면 한다는데….” “그럼 당장 바꿔줘, 그런 것부터 신경쓰면 배우들한테 안 좋아. 다른 불만사항 같은 건 없나?” 서글서글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지만 후배들과의 회의자리에서는 목소리부터 엄격하게 변한다. 10명의 소속배우 중 한참 활동하는 사람이 대다수니 매니저들의 발걸음은 배로 바쁘다. “보디가드로는 좋은데 인상이 좀….” “뭐니뭐니해도 인상이 좋아야 해, 성격은 어때?” 새로 채용할 몇명의 매니저 후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체크사항만 확인하는 아침회의는 간단하게 마무리된다. 물론 “다음날 촬영있을 때 늦게까지 술먹으면 죽는다∼”는 사살성 엄포는 옵션이다.
11:40분 압구정 수다 사무실- 식음전폐하고 시나리오 읽기
“식음을 전폐하고 읽어요.” 겔포스가 낙엽마냥 뒹구는 그의 책상 한구석에 수북이 쌓인 시나리오를 보자면 숙제쌓인 수험생 저리 가라다. “인생에서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시나리오일걸요? 보통일이 아니에요. 주연배우만 있으면 처음 몇페이지 읽다가 안 넘어가면 덮으면 되지만, 조역·단역배우들이 있으니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야 해요. 언제 우리 배우들이 필요한 역이 나올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나 1천여개의 영화사가 충무로 하늘에 쏘아댄 시나리오만 해도 줄잡아 3400여권. “그걸 다할 순 없잖아요. 만약 거절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배우를 대신해서 ‘NO’인 분명한 이유를 찾아야 되니까 정말 열심히 읽어야 해요.” 하지만 그에게 배우들에게 적합한 좋은 시나리오를 만난다는 건, 이상형의 근사한 아가씨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가슴설레는 일. “그런데요. 너무 많은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머릿속에서 서로 섞여요. 아주 새로운 이야기로 둔갑한다니까요.”(웃음)
12:30분 명륜동 이태리 레스토랑- 한번의 실패도 안 된다, 출연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딱이야. 해주면 정말 좋을 텐데….” 준비중인 <귀여워>의 캐스팅 건으로 만나자는 청년필름과의 약속은 결국 <질투는 나의 힘>의 촬영장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촬영이 문성근과 배종옥이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장면이라 점심식사는 따로 시간을 빼지 않고도 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박수무당의 세 번째 아들 머시기 역으로 정재영을 캐스팅하길 원하는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는 “그냥 시나리오만 읽는 것하고 배우가 직접 감독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라며 감독과의 미팅을 제안했고 “다음주쯤 뵙는 걸로 하자”는 확답을 내리고서야 파스타가 한줄, 목구멍을 넘어갈 수 있었다. “캐스팅할 때 매니저들이 너무 많이 잰다, 많이 컸다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당연한 거예요. 예전에는 한 작품 망가져도 다음 거 잘하면 됐지만 지금은 너무나 냉정한 대중이 있어요. 한번 어그러지면 복구가 어렵다고요. 당연히 자기배우와 상대배우와의 밸런스나 궁합뿐 아니라 시나리오에서 배급까지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 부분에서 요구하는 부분이 늘어나는 거죠. 매니저로서 배우를 잘되게 하기 위해 전체적인 아웃트라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직무태만 아닌가요?”
14:00 여기 혹은 저기- 한달 전화요금 45만원, 통신사 VIP
“단발 CF요?” “계약 이전에 그런 식으로 하시면 곤란하죠….” “뭐? 촬영이 어떻게 됐다고?” 그의 16화음 최신형 휴대폰은 정말 쉴새없이 울어댄다. 하루평규 통화횟수는 50, 60건, 한달에 전화요금 45만원, 통신사 VIP회원까지 되었다. “6개월 이상 멀쩡한 전화기를 본 적이 없어요.” 워낙 휴대폰사용량이 많다보니 멀쩡한 휴대폰도 몇달만 지나면 먹먹해지기 일쑤다. 어느날 액정에 아무것도 안 뜨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현상. 하지만 휴대폰 디자인이 무전기 망치형에서 초박형까지 변해오는 동안 그의 전화번호는 10년째 그대로다. 매니저복이라고 불리는 슈트도, 언제라도 명함 꺼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겨드랑이 지갑도 그에겐, 없다. 묵직한 스케줄러 대신 간편한 PDA 하나로 빡빡한 약속과 일정들을 관리하고 사시사철 운동화인 김영일은 나름대로 ‘신세대’다. 참고로 개띠다. 82년생은 아니다.
16:00 인천공항- 배우가 커가면 내 눈엔 눈물이…
“형이 현장에 다 웬일이야.” 신하균이 <복수는 나의 것>을 끝내고 선택한 로맨틱영화 <서프라이즈>. 오늘 촬영은 미국에서 귀국한 신하균을 친구(김민희)를 대신해 이요원이 마중나온 상황이다. 현장 매니저들이 있다보니 요즘엔 그가 직접 촬영장을 찾는 일은 많이 줄었다. “오히려 무슨 간섭하러 왔나, 부담스러워하거든요.” (웃음) 멀리서 신하균을 알아본 사람들이 “와, 실물이 훨씬 귀엽네” 하며 쑥덕쑥덕거리는 중에 한 여성팬은 달려와 사인을 해달라고 <씨네21>을 들이민다. “배우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림자도 커지고 매니저는 그 그림자 안에 숨게 마련이에요. 물론 라면먹고 ‘스타크’하며 편하게 함께 놀던 시절도 그립지만, 자신의 배우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만큼 눈물나는 게 없어요.”
17:30분 차 안- 달리는 자동차, 만능처리 사무실
“제가 스타싸모(장군들 부인) 운전병이었거든요.” 전화, 식사, 일정관리까지, 차 안에서 ‘해서는 아니 될’ 온갖 가지 일을 처리하는 그에게 차는 곧 사무실이다. 사실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사무실비며 활동비를 충당하기 위해 몇달간 밤마다 대리운전을 하기도 했다. “언제라도 다시 운전대 잡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은 바닥까지 떨어져봤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고 “그러지 않기 위해 좋은 신인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 경험이 준 교훈이다.
19:00 역삼동 스튜디오- ‘여자는 현금, 남자는 어음’
“구혜주가 누군데?” 이럴 때 바로 “앤데요” 하고 꺼내놓아야 하는 게 바로 프로필 사진. “이런 분위기로 찍는 건 어때?” 친분을 이용하고 제과점빵으로 입막음한 결과(?) 사진작가 한규종이 공짜로 ‘수다의 홍일점’ 구혜주의 프로필을 찍어주고 있다. 매니지먼트 업계의 속설 중에 ‘여자는 현금, 남자는 어음’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배우의 경우 당장 할 일이 많지만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이른바 ‘대박’을 터뜨릴 확률이 극히 낮은데 반해, 남자의 경우 오랫동안 투자만을 해야 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쫄딱 망하지만, ‘대박’의 확률은 높다는 얘기다. 다행히도 모두 함께 고생을 각오해준 덕에 남자배우라는 어음이 잘 회수됐고, 이젠 여자배우를 관리할 여유가 생겼다. 머지않아 충원할 5명의 배우 중 4명이 여성인 것은 두 번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모두 연극계 출신이 아니며,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는 사실은 첫 번째 고민에 대한 해답인 셈이다. “내가 널 키워준다는 것은 곧 내가 사기꾼이라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적어도 너희들을 쌈마이로 만들지 않겠다는 자신은 있다는 거죠.”
21:00 압구정 포장마차 ‘하자’- 배우 대신 밤마다 술, ‘내 간장 돌리도!’
“간경화 직전이라고 하더라고요.” 브라운아이즈 매니저 이대희와는 류승범이 ‘그집 식구’인 신인가수 뮤직비디오에 출연을 결정하면서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술자리는 맘편한 거죠. 제작자, PD, 감독들과 배우들이 먹어야 할 술을 제가 다 마셔야 하니 일주일에 5일은 저녁에 술자리가 있어요. 당연히 속이 제대로 될 리 없죠.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식도가 다 상했고 이제는 엎드리기만 해도 오바이트가 즉각 나올 정도예요.” 2남2녀의 막내로 귀여움만 받고 자라던 아들이 정확하게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는 ‘매니저’란 걸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이 가지신 걱정도 건강상태만 놓고보면 기우가 아니다. “장가도 가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생활을 이해해줄 여자가 잘 없어요.” 하지만 술자리 역시 유흥이 아닌 충무로 매니지먼트 비즈니스의 한 단계. 한잔, 두잔 들어올수록 혀는 풀리지만 한 가지 생각은 갈수록 또렷해진다. “아, 내일 아침에 학원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