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30km쯤 되었던가. 버스가 방콕을 벗어나자, 매일 회전목마 돌듯 시내만 운전하던 버스기사는 초행길이 무서웠던지 꼭 거북이처럼 달린다. 게다가 길을 물으려 다른 기사에게 전화를 걸고 오더니 영 표정이 시원치 않다. 상크라부리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이 맨발의 타이 아저씨는 날이 어둑해가기 시작하는데 “나 죽으면 책임질 거냐고, 버스 전복되면 어떡하냐고” 길 중간에 차를 세우고 꼼짝도 않는다. 마음 같아선 대신 운전대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지만 결국 근처 동네를 수색해서 빨간색 고물버스 하나를 섭외했다.
쾡하게 팬 눈의 한 동네 노인은 버스 주변에 서서 ‘상크라부리? 상크라부리?’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하긴, 방콕에서 북쪽으로 500km가 넘는 거리에 위치한 깡촌, 타이 총 73개현에서 그 말만으로도 엄청난 시골을 의미한다는 ‘부리’라는 말이 끝에 붙은 3곳 중 한곳. ‘자살관광버스’가 아니고서야 빳뿡거리의 안락한 마사지실을 뒤로 하고 그 험한 오지로 가겠다는 한 무리의 관광버스단을 이해 못하겠지. 에어컨 빵빵하던 고급버스에서 선풍기 달린 구식버스로 옮겨타긴 했지만, 제법 속력을 내어 달리는 새 운전사의 용감함도 마음에 들고, 차창 넘어 불어오는 이국의 저녁 바람에도 괜히 마음이 설레온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을까? 마주 달려오는 자동차도 하나 없이, 그 흔한 가로등도 없이, 버스의 헤드라이트만을 등대삼아 달려가던 캄캄한 비포장 시골길에는 태초의 공포 같은 것들이 달려드는 모기떼만큼 자주 엄습하곤 했다. 커브를 돌자 모습을 드려내는 산 아래 검은 바다. 희미한 불을 달고 떠 있는 수상가옥의 풍경은 행선지가 어디인지도, 미션의 내용도 모른 채 베트남의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던 <지옥의 묵시록>의 공기를 실시간으로 느껴보는 ‘스튜디오 체험관’에라도 들어선 느낌이다. 이러다 정말 이상한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건 아닐까? 혹시 나도 모르게 ‘아유레디’ 입구에 이미 들어선 걸까?. “왜 당신들은 이곳까지 왔나요?” 상크라부리의 후리껍에서 촬영이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길. 버스에서 내린 타국의 기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피곤한 표정의 군인들은 70년대의 베트남 어느 전장에서 마주쳤을 법한 모습들. 내전중인 미얀마 국경에 가까이 위치한 이곳은 작은 폭음만으로도 자칫 민감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 군인들이 촬영현장을 지키고 있다. 촬영을 끝낸 차가 숙소로 돌아갈 때도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영화 밖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이곳은 진짜 전쟁터인 셈이다.
<아유레디?>(R U Ready?)는 우연히 테마파크에 모인 6명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아유레디’라는 관에 빠져들면서 각기 다른 판타지의 장에서 애써 외면했던 자신들의 진짜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는 어드벤처 판타지다. 후리껍에서 촬영되는 베트남전쟁 시퀀스는 극중 황노인이 격는 판타지 제1장. 베트남전 참전 당시 자신의 비겁한 결정 때문에 소대원을 다 잃었다는 자책을 평생 안고 살아온 황노인에게 ‘아유레디’관은 그에게 용기있는 결정을 내릴 다시 한번의 기회를 제공한다.
“살아 있는 역이에요? 죽어 있는 역이에요?” “살다가 죽는 역이래요.” 제작부장 신영일까지 군복을 차려입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많은 이들이 포진된 곳에서도 묘한 질서는 존재한다. 한국 스탭 70, 80명과 현지 스탭 50명 정도가 조용히 섞여 있는 이곳은 속삭이는듯한 비음의 타이어가 윗공기를 차지하는 가운데 크고 묵직한 한국어가 아랫공기를 자치하고 있다. <툼레이더> <비치> 등의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노련한 현지 스탭들과 퓨쳐비젼의 박광남 특수효과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이 만들어내는 팀워크는 열대의 밤공기를 가르며 무언(無言)의 조화를 이루내고 있었다.
“이거, 리테이크 없습니다. 한번에 갑니다!” 세트로 지어좋은 막사를 터트리는 신은 원래는 30개 이상이 터질 대규모 폭발이었지만, 시험 폭발중 타이 국방부 관계자가 방문해 자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폭발 강도나 폭약 갯수를 줄여야 했다. 막사 건너 바나나나무 숲에 설치된 10개의 폭약은 감독의 ‘스타트!’ 하는 구령에 맞추어 마치 폭풍 같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리듬감 있게 터져나간다. “그렇지 그렇지, 시원하게 터진다.” 마치 광기어린 테러리스트처럼 혹은 열정적인 지휘자처럼, 모니터 앞의 윤상호 감독은 머리 속으로 그려놓았던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촬영장 전체를 무섭게 장악하고 있었다.
“데코레이션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해놓는다 해도 광선이나 느낌까지 열대기후의 그것을 흉내내지 못해요.” 왜 굳이 타이까지 왔느냐는 질문에 눈엔터테인먼트의 김윤오 PD는 “타이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봄, 여름, 가을이 다 있어서 좋다. 그리고 한국보다 낮은 제작비로 높은 만족도를 얻어내겠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현지진행을 도와주는 ‘바나나스’가 일주일씩 4차에 걸친 헌팅으로 찾아낸 이 장소는 전쟁 요지로서 손색이 없다. 할리우드 등 세계 각국의 영화들의 로케이션 장소로 이미 노하우를 쌓고 있어서인지 타이 현지진행은 그 어느 곳보다 유연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그간의 블록버스터들은 누수를 많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안고 있었지만 <아유레디?>는 대규모지만 군살을 쪽 뺀 프로젝트”라는 것이 김윤오 PD의 자랑. CG 분량이 많은 영화기 때문에 아예 촬영도 HD파나비전 카메라로 찍고 있다. CG 작업을 위해 필름에서 디지털로 가는 작업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촬영 원본에 거의 손상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작업할 수 있기 때문. 긍정적인 타협에 강하고, 판단이 빠르다는 평을 듣고 있는 윤상호 감독은 규모의 무게에 눌리지 않은 채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어드벤처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철저한 장르영화로서의 재미와 한국적 드라마의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각오로 중무장된 <아유레디?>. 이들이 앞으로 가는 길엔 폭포, 늪, 지진 등의 결코 만만치 않는 시퀸스들이 남아 있다. 1월 말까지 진행될 타이촬영을 마치면 큰 산은 하나 넘는 셈이다.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날아올 ‘아유레디’관으로의 초대장은 올해 7월쯤 관객의 손에 쥐어질 예정이다.타이=글 백은하 [email protected]·사진 손홍주 [email protected]
① “안 돼! 도망가지 마! 물러서지 마!” 다시 선택의 순간에 선 황소위.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② “스타트!” 감독의 사인에 맞춰 10개의 폭약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리듬감 있게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③ “한국에서도 어드벤처영화가 가능하단 걸 보여주겠다”고 포부를 밝힌 윤상호 감독은 긍정적인 타협에 강하고, 판단이 빠르다는 평을 듣고 있다.
④ CG 합성을 고려해 <아유레디?>는 필름 대신 HD파나비전 카메라로 촬영중이다. 소니의 고화질 카메라 HDW-F900은 높은 해상도와 함께 색상 재현이 충실하다.
⑤ “엎드려!” 테마파크에서 갑자기 전쟁터로 빨려들어온 사람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⑥ 에어컨버스 기사가 “위험해서 더는 못 가겠다”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취재팀은 급조된 선풍기버스로 옮겨타는 신세가 되었다.
⑦ “OK?” “Good” 70여명의 한국 스탭과 50여명의 타이 스탭은 짧은 적응기간을 거친 뒤 이제는 무언(無言)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⑧ “우린 옷 갈아입을 틈도 없어요.” 천정명, 김보경, 박준화, 이종수, 김정학, 안석환(왼쪽부터). 늘 ‘세트’로 움직이는 이들에겐 매일매일이 ‘연결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