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렇게 선비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나오다니….” 지난 99년 <반칙왕> 개봉 직후, 사무실에 날아든 시나리오 <살인비가>를 읽은 영화사 봄 식구들은 시나리오와 이종혁 감독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그 엄청난 간극에 당황해 마지않았다고 회고한다. 잔혹하단 말로는 부족한 느낌이 드는, 엽기적인 살인행각, 그 모방범죄를 소재로 한 <살인비가>의 시나리오는 그날로 봄 식구 전원의 만장일치를 얻어 인큐베이팅에 들어갔다. 캐스팅이 늦어지는 바람에 숙성 기간이 2년 반으로 길어지면서, 제목도 ‘너무 정직한’ <살인비가> 대신 ‘신비스런 여운’이 남는 로 바뀌었다.
첫 장편의 크랭크인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데뷔를 앞둔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바심을 냈을 법한데, 이종혁 감독, 과연 선비의 기품을 담은 목소리로 느긋하게 답한다. “제가 박광수 감독님, 박종원 감독님 연출부를 했거든요. 그분들 보통 2년 넘게 준비하세요. 장편은 다 그렇게 걸리는 줄 알았죠. 크게 걱정하진 않았어요.”
군대가 아니었다면, 이종혁 감독은 지금쯤 영화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용산 미부대에서 카투사로 복무하던 당시, 영화에 늦바람이 들어버린 것이다. 직배영화도 없던 시절, 미국에서 건너온 신작들을 챙겨 보다보니 고전도 궁금해졌고, 마침 군대에 있던 비디오 라이브러리까지 유랑하게 됐다. 장르, 감독, 국적, 가리지 않고 보기 시작한 영화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이룰 무렵, “그 좋은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제대 뒤에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고, 독립영화 워크숍에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재학중에 만든 단편 와 <네크로필리아>는 “이미지들로만 구성한, 표현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들. 졸업 뒤에 뛰어든 충무로 현장에서 그는 두명의 스승을 모시게 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연출부와 <송어>의 조연출을 거치면서, 박광수 감독에게서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과 한결같은 자세”를, 박종원 감독에게서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정확히 표현해내는 과정과 그 해석 방향”을 배웠다. 그의 영화세계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스릴러는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로 알려져 있지만, 이종혁 감독은 그런 선입견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사건 해결을 지연시켜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이야기 방식이 서스펜스잖아요. 이런 영화는 오히려 대중적인 요소가 크죠. 멜로도 일종의 서스펜스인걸요.” 는 그 ‘서스펜스’를 잘 활용한 스릴러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생명을 위해선 죽음을, 선을 위해선 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매력적인 역설”에 끌려 이야기를 만들게 됐고, 어울리는 틀을 찾다보니, 스릴러였던 것뿐, 특정 장르를 고집하는 건 아니라고. 기본적으로 두뇌 싸움에 초점을 맞춘 심리스릴러이지만, 형사물로서 필요한 액션은 확실하게 보여줄 작정. 지난 연말 크랭크인해, 촬영에 여념이 없는 이종혁 감독은 장기적인 플랜 공개를 유보하는 대신, “나는 나, 영화는 영화, 관객이 그 둘을 이어준다”는 믿음을 전했다. 글 박은영 [email protected]
어떤 영화??
제작사 영화사봄 출연 염정아,지진희,성지루 촬영중(2002년 여름 개봉)
6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신현은 자신이 죽인 여자의 토막난 시체를 들고 시경으로 걸어들어와 자수한다. 담당 형사는 이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 이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신현은 수감돼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여고생과 임산부가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다. 이상한 우연은 그 살해방법이 신현의 범행수법과 일치한다는 것. 이 사건을 맡은 미연(염정아)과 강 형사(지진희)는 신현의 모방범죄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여나간다. 이들의 직감대로 신현의 살인패턴과 유사한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미연과 강 형사는 수감중인 신현을 찾아가지만, 연쇄살인사건의 단서를 캐내는 데 실패하고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 2002 신인감독 14인 출사표
▶ [2002 신인감독 14인] 의 김현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아유레디?>의 윤상호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데우스 마키나>의 이현하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귀여워>의 김수현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명랑만화와 권법소년>(가제)의 조근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정글쥬스>의 조민호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일단 뛰어!>의 조의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서프라이즈> 김진성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오버 더 레인보우>의 안진우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로드무비>의 김인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의 이종혁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