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이야기>의 이성강 감독과 <원더풀 데이즈>의 김문생 감독은, 같은 길을 다르게 걸어가는 동행들이다.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를 거쳐 무리하지 않은 제작비로 푸근한 파스텔조 2D 느낌의 컴퓨터애니메이션을 마무리한 이성강 감독과 200여편의 CF를 찍은 경력에 바탕해 실사와 미니어처, 셀과 3D를 넘나드는 대작 규모의 SF애니메이션을 준비중인 김문생 감독. 시장 규모가 적고 관객층이 두텁지 못해 쉽지 않은 장편 애니메이션 창작의 길에서, 이들은 각각 성장의 기억과 환상을 품은 일상의 동화와, 황량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다룬 SF라는 다른 걸음으로 창작의 꿈을 꾸준히 다져왔다.소재만큼이나 출신도 스타일도 제작규모도 다르지만, 오랫동안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연서를 쓰며 행복한 만남을 그리는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먼저 완성된 <마리이야기> 개봉을 앞두고, 두 감독이 만났다. 느리고 나직한 이성강 감독의 수줍은 말투와 활기 넘치는 김문생 감독의 경쾌한 말투만큼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고생길(?)을 걷는 여정과 <마리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김문생(이하 김) 처음 뵙죠. 지난번 국립극장에서 한 시사회를 보러 가서 부러웠어요. 야, 저렇게 완성을 하는구나, 그랬다니까. 나한테도 저런 날이 오겠지? 생각 같아서는 애니메이션이 1년 전에 끝났어야 하는데 아직…. <마리이야기> 보면서 이미지가, 특히 컬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이성강(이하 이) 컴퓨터는 색깔을 정하는 게 비교적 쉽잖아요. 꼭 컬러를 지정했다기보단 대신 어떤 추상적인 기준이 있었죠. 사람들이 파스텔톤이라고 말하는 것, 회색이 많이 들어간 것. 어떤 색들이 잘 조화가 되고, 어느 정도 채도를 맞춰야 부드럽게 만나는지, 개념적인 기준을 얘기하면서 했어요. 배경작업할 때부터 내 눈에 맞는 그림을 서로 얘기하고, 컬러도 맞추면서 작업자들이랑 서로 보는 눈을 맞춰간 거죠. 또 컴퓨터 작업이 괜찮은 게, 마지막에 합성할 때 다시 컬러를 조정할 수 있잖아요.
김 내가 재밌다고 봤던 컬러가 뭐냐면 보라색이에요. 보라색이 쉽게 구사하기 어려운 색인데, 판타지를 보면 보라색 배합을 굉장히 잘해놨더라고요. 보라색을 많이 쓴 것도 아닌데, 환상부분 하면 보라색 이미지가 기억에 남으니까. 현실이 블루 이미지라면 말이죠. 아마 컬러에 대해서 <마리이야기>가 지금껏 한국 애니메이션이 보여주지 못한 색감을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잘 구사하는 색은 아닌데 보라색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웃음) 보면서 또 재밌다고 생각했던 게, 외곽선이 거의 다 없잖아요. 그건 지정해서 없앤 거예요?
이 손 같은데, 마디를 표현하고 이럴 때처럼 필요한 선은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지우개질 하듯이 지워버린 거예요. 동화 같은 경우는 플래시 소프트웨어를 썼는데, 플래시가 원래 인터넷용이잖아요. 근데 선과 면을 따로 다룬다든지 하는 데도 유용했어요. 플래시를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에 좀 놀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상줘야 되는데…. (웃음) 다른 소프트웨어들도 페인터, 포토숍, 다 100만원선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들이죠. 다른 소프트웨어들도 많겠지만, 일단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고 많이 알고, 빨리 배울 수 있고, 친숙한 소프트웨어가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소프트웨어로 어떤 경로를 새롭게 만드는, 그래서 원하는 그림에 더 빨리 가깝게 접근해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푹신한 소파에 앉은 듯 편안하게 봤으면
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이 첫 번째로 극복해야 하는 게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기술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표현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첫 테이프를 잘 끊은 것 같아요.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화나는 작품들이 많아서…. (웃음) 두 번째가 드라마라고 생각하는데, 감동을 주는 거요. <마리이야기>에서는 남우가 마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사실 감정이입이 좀 덜 되는 게 있었어요. 남우가 왜 마리를 만나게 됐을까 하는 것. 그게 어디서 출발했을까, 개인적인 경험인지, 아니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건지. 전 개인적인 경험일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이감독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도, 예전 단편들 보면서 굉장히 집착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이야기>는 집착적이라기보다 성인의 동화 같고, 단편들하고는 또 달라서….
이 <마리이야기>는 예전 단편들 중에서 <우산>이란 작품이랑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한 남자가 자살을 하는데, 전쟁이 나고, 살기 싫어지고 하는 과정이 간략하게 드러나죠. 어떤 상실감을 회복하고 싶고, 그 회복을 나타내는 게 상징적이에요. 비 온 뒤 우산에 갇힌 물고기를 놓아주는 식으로. <마리이야기>가 그 작품하고 좀 가깝다고 생각해요.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있는데, 자기 꿈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사람이죠.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되게 밋밋하게 살고 있고.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데, 다 평범한 얘기지만 그때는 아주 작은 것에 감동받을 수 있던 감수성이 있었죠. 남우와 준호라는 소년들은 막 사춘기로 들어가는 시간에 있어요. 동성적인 관계 중심에서 이성적인 만남을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감정들을 느끼고. 사람들이 이별하고, 떠나가고, 거기서 마리라는 존재는 주인공의 성장에 의해서 만나는 관계죠. 친구도 떠나고, 자기 자신이 불안한 속에서 어떤 세계를 꿈꾸는 것. 이미 있어왔던 세계로 설정돼 있는데, 남우가 그걸 만나야 하는 당위성은, 자기가 상실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데 있어요. 하지만 성장한다는 게 늘 그렇듯이, 뭔가 잡을 수는 없는 거죠. 만지려고 하면 멀어지고, 그런 아쉬움이, 성장할 때 뭔가를 그리워하고 하는 모습과 비슷한 게 아닌가.
김 <마리이야기>를 본 느낌 중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게 있는데요. 전 현실을 잊고 미래에다 보험을 든 것처럼 사는 게 싫거든요? 미래가 마치 우리의 유토피아인 양, 거기다 보험들어놓고, 난 행복하다 그러는 관점이 현대사회를 아작냈다고 봐요. 과연 우리가 뭘 먹고 살아야 되나, 했을 때 난 현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현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어떤 단계고. 지금 먹고 있는 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나중에는 맛있을 거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마리이야기>도 판타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꿈을 꾸게 되는 현실이 중요한 거죠.
이 <마리이야기>는 편안하게 봤으면 하지만 사실 너무 진지한 것 같아요.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얘기고, 소소한 일상도, 환상도 결국 전체적으로는 다 한 사람의 세계, 주관적인 세계죠. 뭔가 객관적인 것과 다른 세계를 각자가 다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가 그런 걸 무시해왔다면, 굉장히 바보 같은 생각, 추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걸 갖고 있고, 그게 그 사람에겐 마치 종교처럼 중요한 거죠. 보면서 굉장히 편안하게 빨려들고, 편안하게 나오는, 가슴이 뛴다든지 다음 장면에는 칼이 나올까 어떨까 그런 흥분이 아니라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듯이, 보고 있으면 마치 마취된 것 같은 느낌으로 갔으면 했고요. 처음 예고편 만들었을 때 가장 기분 좋았던 평이, 마약을 물에 타서 빨아들이는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웃음) 그렇게 취해서 들어가서 취해서 나올 수 있는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죠. 그런 느낌이라면, 그 느낌 자체가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과 가깝다고 말이죠.
김 아주 편안했어요. 일단 그림이 획기적이니까 거기에 빠져서 가다가 보면, 그 장면을 계속 보고 싶은 느낌. 영화라는 장르가 어떤 메시지를 던질 때 과연 관객이 변할까? 전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건 그냥 그 시간이에요. 다른 이미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미지가 흘러서 그 시간에 빠져들게 하는…. 그 시간에 <마리이야기>가 굉장히 충실한 것 같아서 좋았어요. 영화는 누구를 계몽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하는 동안 그게 이미지로 남으니까. 아니면 낯선 경험을 하게 하든지.
이 영화는 꿈일 수도 선동일 수도 있겠지만, <마리이야기>는 80분 동안 볼 수 있는 꿈이죠. <마리이야기>를 보고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편안하게 보고 극장을 나와서 하늘을 한번 본다든가, 그런 종류의 행동을 취하게 하는 정서적인 느낌이라면 만족해요. 구름이 좀 예뻤으면 좋겠네, 뭐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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