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김기덕은 다루기 쉬운 동물이다. 그의 영화에 격렬한 비난을 쏟아붓는 이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얼마간 호의를 내비치는 이들까지도 그를 마치 동물처럼 다룬다. 이런 경우에 찬사와 비난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된다. <수취인불명>과 <나쁜 남자>에 대해 얼마간의 만족감을 내비치면서도 거기에서 이른바 ‘길들여진’ 야수성을 지적하며 김기덕 고유의 색깔이 엷어져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 절반의 찬사가 아닌 우회적인 비난일 뿐이다. 차라리 의연히 분석가를 자처하며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들이야말로 좀더 그를 잘 대접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듯싶다. 동물에게는 무의식이 없다고 말한 게 누구였을까?
그러니까 아무도 김기덕에게서 무언가 배우려 들지 않는다. 그는 감싸주고, 경멸하고, 지켜보고, 비난하고, 분석할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말을 경청할 만한 인간은 못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영화를 만든 지금에 와서도 그의 전언은 여전히 ‘수취인불명’이다. 최근작 <나쁜 남자>에서 그가 자꾸 이전의 영화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모방과 반복을 통한 화해의 모색이 아닐 것이다. 기어이 감동이 깃든 탄식을 뱉어내게 만들었던 <파란 대문>의 후반부, 즉 서로가 서로를 몰래 훔쳐보며 행위를 모방하고 반복하던 진아와 혜미의 관계를, 김기덕은 더이상 꿈꾸지 않는다. <나쁜 남자>에서 이루어지는 전작들에 대한 환기는 사실 <수취인불명>에서 자신이 낳은 아들의 살을 씹어먹던 창국 어머니의 모습에 좀더 가까운 것이다.
증오와 가학으로 점철된 세계, 남녀관계에 대한 왜곡된 묘사, 병적이고 극단적인 섹스와 폭력, 이미지의 강렬함에 못 미치는 빈약하고 치졸한 내러티브, 도식적인 상징과 메타포를 이유로 그의 영화를 문제삼는 것은, 사실 정작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거나 그저 투정에 불과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지금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김기덕은 90년대 한국영화계가 배출해낸, 아니 토해낸 유일하게 ‘새로운’ 감독이었다.
우리는 가치의 경계를 부수고 선악을 넘어서 유희를 즐기는 감독들을 이미 알고 있다. 가령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수상쩍고 불편한 강간장면과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내지는 최근의 <피아니스트>)이 보여주는 위악이 그래도 몇몇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는 것은, 그 감독들이 진정 놀이하듯 가치들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보았던 미이케 다카시의 <비지터 Q>에서는 한술 더 떠, 딸은 아버지를 꼬드겨 섹스를 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두들겨패고, 아버지는 죽은 여자의 시체를 집안까지 끌고 들어와 시간(屍姦)하고 마침내 ‘즐겁게(!)’ 토막내기까지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어쩌면 문제는 김기덕이 충분히 잘 놀지 못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영화에 슬쩍 감상의 옷을 입힘으로써 꼭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곤 한다. 감상을 덧씌움으로써 비난의 여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주로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김기덕은 흔히 비교되는 김기영 감독보다는- ‘엽기’라고 하는, 이제 지나치게 외연이 넓어진 단어의 남용이 만들어낸 이상한 접점- 오히려 임권택 감독쪽에 가깝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점들을 두고 얄팍한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이 치밀하지 못한 사유의 결과인 것처럼, 김기덕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김기덕은 자신의 인물들과 함께 가치전도의 즐거운 유희를 벌일 방법을 알지 못한다(굳이 이런 유희를 원한다면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같은 소설쪽으로 눈을 돌려볼 일이다). 아마도 그 인물들과 자신의 과거 사이에 걸쳐 있는 질기디 질긴 끈을 쉽사리 잘라내어버릴 만큼의 냉혹함을 견뎌내질 못하는 것 같다. 위에 언급한 감독들이 보여주는 위악은 김기덕에겐 불가능한 것이며 어쩌면 무가치한 것이기조차 한 것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시신을 멍든 물로 둘러싸인 초라한 공간으로 덮어도 보고(<악어>), 있을 법하지 않은 화해의 몸짓 위로 눈을 뿌리기도 하는(<파란 대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소망의 표현은 될지언정 공감을 끌어내기엔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그의 인물들이 입을 닫아버린 순간(<섬>), 그가 비로소 제대로 주목받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다. 마침내 그는 증오 속으로 침잠함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눈물을 끌어내는 데 이른다(<수취인불명>). 그리고 그때 거기서, 그 가혹한 순환의 고리 속에서, 그는 인물들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면서도 무리한 감상주의를 탈피할 방법으로 운명을 끌어온다(어쩌면 이것은 <실제상황>에서 처음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여인(나중에 선화임이 밝혀지는)이 죽기 위해 바닷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을 무심하게 외면하는 한기- 감독은 한기가 그 자살장면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영화 속에선 오히려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와 이를 놀라 바라보는 선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쁜 남자>의 한 비현실적인 장면은, 김기덕이 이제 유희가 아닌 방식으로 가치들을 다루면서 운명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법- 즉 긍정의 긍정- 을 모색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여전히 서툴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기엔 모종의 위선적인 이상주의를 비웃으면서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자기의 현재의 모습과 다른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운명애, 즉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있는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쁜 남자>가 전작들로의 단순한 회귀도 반복도 아니며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꼭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관계의 ‘비정상적인’ 묘사와 여성성기에의 집착을 지적하며 그의 영화(와 나아가 감독 자신)를 퇴행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는 이들의 주장에는 확실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사실 그러한 묘사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묘한 관계 위로 역사적 관계를 포개어 놓은 <수취인불명>의 경우를 떠올려 보라.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공통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수취인불명>뿐 아니라 김기덕의 모든 영화들은 묘사의 수위에 있어서라면 (비록 문자로 된 것이기는 하나) 남정현의 그야말로 ‘엽기발랄한’ 단편 <분지>에 한참 못 미치는 작품이다. 아들의 머리를 강제로 끌어당겨 미군에 겁탈당한 자신의 음부를 샅샅이 관찰하게 하는 어머니, 그걸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일종의 쾌감 비슷한 감정으로 하여 아랫도리가 다 자르르 흔들’리는 아들의 모습은 그 얼마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 그나마 반공법이 더이상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김기덕은 어쩌면 운이 좋은 감독인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의 관계 위로 역사적 관계를 포개어 놓지 않은 다른 영화들의 경우, 여성성에 대한 자상한 이해를 포개어 놓지 않았다는 점이 종종 문제가 되며 그래서 김기덕 영화는 곧바로 ‘자궁에서 도 닦는’(<씨네21>의 <나쁜 남자> 20자평 중) 남성 판타지로 간주된다(하지만 마찬가지로 자궁에서 도 닦아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마무라 쇼헤이를 생각하면 금번의 평은 가히 극찬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판타지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충족시키는 대신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들여다보게끔 하고 그 심연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가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그 나름의 분석의 결과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김기덕은 적어도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두고 이해를 가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자상스러운 리얼리즘이나 위선적인 구원의 몸짓보다는 가혹한 판타지가 좀더 솔직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김기덕 영화의 본질이 증오라고 지적하는 것은 정확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문에 비난하기 전에 그것이 왜 비난받을 만한 가치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판타지라고 비난하면서도 판타지 속의 사건을 현실의 법정에 불러들여 심판하려 하지는 않는지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나쁜 남자> 홈페이지의 이벤트 가운데 하나인 모의재판은 그야말로 ‘엽기적인’ 코미디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두고 ‘엽기적’ 혹은 더 심하게는 ‘변태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 말을 정당하게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진짜 엽기적인 사족 하나.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www.imdb.com)에서 김기덕을 검색해보면 그는 지금까지 일흔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며 필모그래피에는 <파란 대문> <섬> 등과 함께 <영구와 황금박쥐>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이인의 희한한 오버랩.)유운성 [email protected]▶ 나는 왜 김기덕을 지지하는가 / 반대하는가
▶ 내가 김기덕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유운성
▶ 내가 김기덕을 비판하는 이유...주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