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영화라는 시각장치와 대중매체는 성별관계를 둘러싼 억압과 무의식의 기제가 어떻게 형성되고 또 작동하는가를 가장 두르러지게 가시화시키는 영역 중 하나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과 섹스를 포함하여 여남간의 관계를 둘러싼 모티브들은 불안, 거부, 왜곡과 같은 여러 가지 ‘증후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의 성적심리상에 존재하는 심층적인 ‘난점들’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킬러, 디아스포라, 엽기녀, 조폭, 총을 든 여성, 여성 버디 등 요즈음 한국영화의 여성에 대한 재현은 센세이셔널한 소재적 확장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에게는 종종 상당한 공간적 가동성과 물리적 위협력, 자율적인 관계성이 허용되기도 한다. 반면 <친구>에서 시작된 ‘조폭영화’의 행진은 마초적인 남성성과 남성 연대에 대한 찬미, 성공과 패배라는 신화에의 몰두, 공격적인 액션과 정서들의 난무를 통해서 완강하게 ‘남성적 서사’를 펼쳐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은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성별관계 및 역할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동요와 확장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반응 양식들로 읽힌다. 그러나 21세기 초 한국영화 내의 성별 정치학은 전반적인 반동화 곡선을 그려보이고 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부재와 사라짐, 물신적 대상과 혐오의 대상 사이를 오가고 있고,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폭력과 모욕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극단에 바로 김기덕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김기덕 영화들은 여성관객과 여성비평가라는 두개의 정체성 모두에 위협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한명의 여성관객으로서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경험이라면, 그의 영화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비평의 양상들은 여성비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 만연된 성차별주의 의식과 폭력성에 대한 둔감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기덕 영화들이 지금과 같은 이슈와 주목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해외영화제에서의 평가와 더불어 국내의 거의 모든 남성평론가들과 일부 여성평론가들의 호의어린 찬사에 힘입은 바가 크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 대한 ‘선전포고’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쁜 남자>와 같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의 배짱과 용기는 이런 맥락 속에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는 ‘작가’의 지위를, 그의 영화들에는 ‘예술영화’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영화 스타일에 대한 ‘미학적’ 평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주제의식에 대한 ‘공감적’ 서술로 구성된다.
그의 영화가 갖는 이미지성은 ‘파괴적이고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것’으로, 그의 작가적 재능은 시각적 영역에 이어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까지 갖추는 ‘진화와 성숙의 과정에 놓여진 것’으로 평가받는 한편, 밑바닥 인생이 보여주는 공격성은 ‘중산계급적 허위의식과 일상의 진부함을 뒤흔드는’ 것이라면 그 거침과 비천함은 ‘인간의 추한 본능을 생생한 에너지로 묘파하는’ 것으로 찬사받는다. 그 결과 그의 영화는 ‘장 비고에서 레오스 카락스’를 잇는 엉뚱한 계보에 올려지기도 하고, 홍상수 영화가 갖는 의미의 지점과 같은 대열로 격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평 담론들은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폭력적 성을 남성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이해하고, 반여성적 이데올로기를 아웃사이더 남성의 절망적 자학으로 미화하며, 반사회적 내용을 도덕률을 초월한 예술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다른 정치학으로 바라본다면 그러한 평가의 허구성과 맹점은 곧 드러난다. 한 평론가가 “그의 영화의 에너지는 증오”라고 표현한 바 있지만, 정확하게 그의 영화가 갖는 호소력과 차별성은 바로 ‘여성에 대한 극도로 착취적인 상상력과 혐오증적인 태도’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페니스 파시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성은 여남관계를 둘러싼 지배와 권력의 개념이 가장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장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일관되게 육체로 환원되고 성적 존재로 본질화되는 한편, 남성과 여성은 지배와 종속으로, 주체와 대상으로 양극화된다.
매춘과 강간이라는 모티브가 빠짐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의 욕망과 정액을 담아내는 수용체이자 남성의 성적 지배를 통해서 고통받거나 치유되는 대상이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존재마저 ‘양공주’로 성애화되고 ‘여대생’은 극도로 무기력하게 ‘창녀’로 전락하게 되며, 여남간의 사랑이든 성이든 어떤 식의 상호충족과 존중은 찾아볼 수 없고 분노나 좌절감 같은 부정적 감정들과 병적인 정열과 집착의 배출구가 될 따름이다. 또한 마치 하나의 도관(導管)처럼 여성의 성기는 남성 욕망의 회로가 됨으로써 남성다움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그 공유를 통해서 남성들이 연대하게 되는 토대가 된다.
여성에 대한 이처럼 철저한 ‘성화’(sexualization)는 결국 남성의 지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행사하는 방식이자 남성 주체의 확립을 위해 타자로서의 여성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다.
<나쁜 남자>가 ‘나쁜 영화’인 이유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폭력이 어떤 맥락에 자리잡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의미작용하며, 결국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갖는가의 문제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끊임없는 폭력은, 바로 이처럼 무력화되고 공동화(空洞化)된 여성은 남성이 자기 안의 악과 증오를 투사하고 전이시키는 대상임을 말해준다. 이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가 성애화되는 과정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릴 뿐만 아니라, 공격과 침투로 설정되는 남성의 성이 사회적, 윤리적 규범들을 깨뜨릴수록 그 권력과 쾌락이 증대되는 결과와도 맞닿는다.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나쁜 남자>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아웃사이더’ 남성의 분노는 여성에게 집중되는데, 협박, 구타, 강간 등을 포함하여 그녀에게 행해지는 폭력적 지배는 그에게 보상과 치유, 자기 확증과 초월을 가져다줌으로써, ‘나쁜 남자의 자기 완성’과 ‘평범한 여성의 자기 절멸’이라는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자원이 없는 남자주인공이 여성에 대해서 갖는 절대적인 우월성과 지배력은 오로지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고 그 지배의 수단은 강간과 폭력과 같은 ‘공포정치’이다. 그러니 ‘페니스 파시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이 영화 속의 ‘기이한 로맨스’는, 여성의 성은 바로 ‘창녀’라는 역할 속에서 그 본질을 구현하게 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여성은 구원되며, 이 모든 과정은 바로 한 여성에 대한 한 남성의 가장 깊은 이해와 사랑의 구현에 다름 아니라는 메시지를 교묘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역설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남성 주체에게는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는 효과를, 여성 주체에게는 사회적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김기덕의 영화들은 여남간의 불평등과 적대성, 여성의 성과 신체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과 침해를 끈질기게 정당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자들에 대한 어떤 성찰도 갖고 있지 않은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 행위에 다름 아니라면, 이에 대한 남성평론가들의 지지는 공식적인 담론이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남성적 무의식에 대한 동조이자, 남성 주체성을 재확증하고자 하는 유혹에의 굴복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주유신/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나는 왜 김기덕을 지지하는가 / 반대하는가
▶ 내가 김기덕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유운성
▶ 내가 김기덕을 비판하는 이유...주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