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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과거와의 대화”
2002-01-16

연재를 마치며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이 연재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작업은 <한국영화전사>의 저자인 고 이영일 선생이 1970년을 전후하여 당시 생존해 계시던 원로 영화인들을 만나 인터뷰해둔 녹음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은 현재 대학 혹은 대학원에 재학중인 예비 연구자들 일곱명의 손으로 진행되었는데, 총 열분의 녹음 자료를 각자 나누어서 고스란히 글로 옮긴 뒤 지면의 분량에 맞추어 요약하고 각 인물에 대해 간단한 해제를 덧붙이는 일을 모두 이들이 했다. 애초에 품었던 ‘3세대 100년에 걸친 대화’가 되리라는 기대가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뿌듯하게 충족되었고 소중한 경험으로 남으리라는 데에 작업자들 대부분이 동의했다.

연재에 착수할 때 소개한 대로 이 팀은 두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왔다. 하나는 1969년에 간행되었다가 절판된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을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회고록을 <영화사를 위한 증언>으로 엮어내는 것이다(이영일 선생 자신이 훗날 책으로 발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종종 사용해온 제목이다). 필자는 생전의 스승께 “<한국영화전사>는 한국영화사 연구를 위해 객관적인 초석이 될 수 있는 책이므로 원저자의 관점과 연구가 충실하게 보강된 개정증보판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 방향대로 착수하겠다. 어렵겠지만 학생들과 함께 시작해보자”고 선포하신 게 우리의 마라톤이 시작된 경위다. 작업 착수 한달 만에 선생께서 타계하셨을 때 우리는 서로를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호칭에 합당한 예산이나 자질을 확보하고 있느냐는 안팎의 질문은 우리를 초라한 느낌으로 내몰기도 했지만,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자칭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이상의 경위는 두 책의 원고 작업을 하는 데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했다. 원저자가 타계한 출판물을 일관된 색깔로 개정증보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토론 끝에 <한국영화전사> 작업의 본령을 ‘책의 원본과 3학기 동안의 강의록을 타자해서 한데 뒤섞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다른 자료를 배제한 것은 감동과 존경심을 갖고 직접 수강한 제자들이 확보하고 있는 원저자의 생각과 말이야말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도 논란의 여지는 상당했다. 예컨대 1969년의 서술과 2000년 무렵의 노학자의 구술 사이에는 관점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사실이 단적인 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생 자신의 근본 취지, 원본 <한국영화전사>가 담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느낌 사이를 오가며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한국영화전사>는 원본이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史實)상의 몇몇 오류와 더불어 강의 당시의 기억의 문제, 저자의 관점과 관련한 내적인 불일치,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토론하면서 추가된 쟁점들을 내포하는 불균질적인 텍스트로 평가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순과 난점을 예고하면서도 <한국영화전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선명해지고 동시에 이 책을 둘러싼 논쟁도 격화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국영화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기를 시도하는 후학들이 맞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史實)들의 보고(寶庫)이자, 한 분야를 지킴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보게 된 노대가의 음성이 뒤섞인 이 입문서를 대체할 저작이 다시 나오기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복혜숙 할머니의 말투를…”

<영화사를 위한 증언>은 인터뷰의 쌍방 당사자가 모두 타계한 상태에서 전문 녹음기사가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열악한 상태의 녹음자료를 글로 복원해낸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훗날 독자나 연구자들이 직접 듣고 판단할 수 있도록 녹음자료 전체를 CD-롬으로 복각하여 주요 도서관에 비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것은 좀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고 단념하게 된 다음에는, 각각의 증언내용을 상호 비교하고 외부 자료를 통해서 빈틈을 채워보자는 의견과 순수 자료집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전자를 주장했던 이기림(동국대 영화과 석사과정)은 각주 형태로 해제를 덧붙이는 실험을 주도해왔는데, 자청해서 하는 고생이 가져다주는 보람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부러워하는 중이다.

사실 이 작업이 가져다준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면 바로 팀원들 자신의 변화일 것이다. 팀원들의 고백은 개척기 원로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한국영화사 혹은 20세기 전반기의 사회문화를 단지 문헌으로만 만나는 건조한 역사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실체감을 가지고 살아 있는 우리의 일부로서 이해하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영일 팬클럽’을 자처하는 최예정(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은 “복혜숙 할머니의 말투를 따라하게 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복 할머니와의 이별’을 진정으로 아쉬워했고 각 인물들의 말투가 전해주는 뉘앙스마저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안선주(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가 팀 내부에서 가장 많은 팬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도, 비명을 내지를 만한 일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정해진 시간 안에 해치우고 나타나서 쓰윽 지어보이는 미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팀원들 모두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강했던 김경민(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임종 직전의 이영일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며 자주 울먹이던 이유미(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이 작업에 매진하는 동안 <한국영화전사>의 초고 작업을 책임졌던 김정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와 이설화(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등 7명의 예비 연구자 혹은 예비 영화인들이 나눠가진 이 경험은 훗날 제 나름의 색깔로 싹을 틔우게 되리라고 믿는다. 만약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사람 몫의 영예가 있다면 이들 7명의 팀원들에게 돌려져야 합당하다.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작업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들려준 선대 영화인들과 그 자신이 또 한명의 선각자였던 이영일 선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열분의 영화인들을 통해 배우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처음부터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그분들은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빛의 예술’이라고 하는, 오늘날 교과서의 첫머리쯤에나 나올 만한 상투적인 형용사를 살아 있는 명제로 만들기 위해 김성춘이라는 인물이 전 생애를 바쳐 무엇을 했어야만 했는가를 따라 읽으면, 그에게 남겨진 ‘한국인 최초의 조명기사’라는 희미한 수식어가 얼마나 가벼운 공치사에 불과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목수의 아들 이경순이 녹음이라고 하는 하이테크에 접근한 이래 3500여편의 한국영화를 녹음했다고 할 때, 감독의 예술로 기록되어온 영화사 기술의 전통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영일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외국산 장비를 가지고 영화를 찍는 21세기에서 지난 세기의 초반부에 ‘코첼’이라는 국산 카메라를 만들고 평양 지역에 150평 규모의 스튜디오를 지어 20여년 가까이 영화활동을 지속했다는 이창근의 사례를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서울이라는 중심지 위주의 시선을 지역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단서를 보게 된다.

식민지 시대란 근원적으로 인간의 삶에 화해할 수 없는 불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참혹하게 증거하면서도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와 민족 영화의 본류를 모색한 윤봉춘, 이규환, 최금동과 같은 원로의 이야기는 차라리 전설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민족의 감정을 특정한 형식으로 형상화한 이들 영화가 있고 난 뒤에야 민족 현실에 대한 집단적 인식의 동질성이 확보되었다는 이영일의 지적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개화기 신여성이자 ‘딴스 홀’의 마담으로서 말년까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여배우 복혜숙, 시계포에 놓여있던 환등기의 빛에 취한 꼬마로부터 한국영화의 전 시대를 아우르는 기술사의 방대한 계보를 형성한 거두로 생을 마쳤던 이필우, 초기 영화의 관객 수용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감독을 능가하는 창작의 주역으로 대접받았던 변사 성동호, 감독·시나리오·편집·제작·기획·홍보·평론 등 초기 영화계의 ‘올 라운드 플레이어’였던 이구영 또한 영화의 역사를 ‘필름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람의 역사로도 보아야 한다’는 이영일의 지론을 뒷받침한다.

현재 <한국영화전사>는 영진위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출판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결정한 상태로서, 남아있는 몇 가지 미결 과제들은 출판 과정에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영화사를 위한 증언>은 원고 분량이 총 4천 매가 넘는 데다 시장성이 크지 않은 학술 자료인 관계로 아직은 출판 일정이 불투명한 상태다.

필자와 팀원들은 본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료 이외에 이영일 선생 자택에 보관된 자료는 단 한 장도 개인적인 목적으로 전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고 거기에 충실했다. 유족들은 모든 자료가 최선의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적절한 기관을 물색해서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상태다.

1월18일 선생의 1주기 때 출판기념회를 하자던 우리끼리의 다짐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모두가 필자의 탓이다. 순수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한 팀원들, 이 일이 가능하도록 초석을 놓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 귀한 지면을 통해 옛 영화인들의 육성이 울려 퍼지도록 해준 씨네21, 격려와 염려를 아끼지 않은 독자들, 그리고 생전의 선생께서 베풀어주셨던 사랑과 신뢰, 그 믿음을 유지해주신 유족께 감사드린다.

(다음주부터는 1970년대초 여배우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던 윤정희씨의 회고록이 몇차례 나눠서 게재됩니다-편집자)

김소희/ 영화평론가·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