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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기장의 기대작!
2002-01-09

심재명/ 명필름 대표 [email protected]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슬슬 시작해서, 중학교 입학하면서 본격화된 나의 일기 쓰기는 사회생활 3년차 때까지 질기게 이어졌다. 햇수로 치면 13년이 넘는 긴 세월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정 쓸 게 없으면, 그날 처음 맛본 신제품 라면의 맛을 상세히 기록한다거나, 새로 나온 과자 봉지를 붙여놓는 쓸데없는 짓을 하기도 했다.

묵은해를 보내며 실로 몇년 만에 그 일기장들을 들춰보았다.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었으니 거의 25년 전의 ‘잡스러운 기록’들을 꺼내 읽은 셈이다.

재미있는 건 새해가 되거나 새달이 되면 그 달에 읽어야 할 책들과 봐야 할 영화들을 번호를 매기며 적어놓고 목표를 설정해놓는 것이었다. 그 책들의 수준이래봤자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삼중당 문고 전집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서적들 정도이고, 봐야 할 영화들은 뻔하고 평범한 수준의 것들이다.

어쨌든 목표량은 그 다음달엔 어김없이 ‘O’와 ‘X’로 읽은 것, 본 것,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 정리되었다. 그중엔 억장이 무너져내리게 감동적이거나, 나아가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은 책이나 영화도 있었고, 그저 그렇게 지나가버린 별볼일 없는 것들도 있었다.

지난호 <씨네21>은 ‘2002년 최강의 프로젝트’란 제목의 기획으로 올해의 기대작들을 모아 일람할 수 있게 했다. 그 기사를 보고 옛날 버릇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봐야 하는 영화, 보고 싶은 영화의 순번을 매겨가며 쏠쏠한 재미를 느꼈던….

내 일기장의 기대작들은 이렇다. 우선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날보러 와요>가 보고 싶다. 최근 <살인의 추억>으로 제목이 바뀌었다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연극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시나리오인데 시나리오에 대한 소문이 충무로에 자자하다, 좋은 쪽으로.

<플란다스의 개>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찌 이리도 ‘지리멸렬한 인간’ 군상을 유니크하게 그렸을까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다. 데뷔작은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완벽한 성공이길 기대해본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도 무척 보고 싶다. 일찍이 한국영화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깜찍한 꼬마 아이가 오롯한 주인공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펼친 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새삼재삼 궁금하다.

이정향 감독이 어떻게 자신의 유년과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반추해낼까. 마지막 장면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될까, 아니면 눈물 바가지를 쏟게 될까.

<일단 뛰어>는 감독의 나이 때문에 궁금하다. 25살의 나이(최야성 감독과 이서군 감독을 제외한다면 최연소이다)에 장편 데뷔를 한다지. 명랑코믹액션영화라는데, 스물다섯살의 감성은 어디까지일까.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는 감독보다, 소재나 주제보다 궁금한 것이 이혜영이란 배우이다. <티켓>과 <땡볕>에서 ‘강렬함’을 넘어선 ‘강력한’ 눈빛으로 보는 이의 얼을 빼놓았던 그녀가 시대를 뛰어넘어, 실로 20여년 만에 영화로 돌아온다니, 젊은 청년 감독과 관록의 여배우의 ‘미팅’이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그외에도 제작비 규모로, 낯선 시도로, 새로운 실험으로, 특정배우 때문에, 어떤 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유로 봐야 할, 보고 싶은 근거가 충분한 영화 목록은 2002년엔 특히 차고도 넘친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2002년에는, 누군가의 가슴을 비수처럼 뚫고 지나가는 ‘촌철살인’의 맛이 있는 영화, 뭉근하게 끓여낸 스튜처럼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영화,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게, 또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까지 하는 그런 멋진 영화들이 속속 쏟아져나오길 기대한다.

새해, 첫달은 꿈을 꿀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