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겨레>에 쓴 ‘얼치기 도사들’은 약간의 소란을 낳았다. 이미 해병전우회나 의사들과 더 큰 소란을 겪기도 했거니와 졸렬하나마 사회적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으로선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나로선 대수롭지 않아 할 만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접을 수 없는 불편함이 내내 남았다. 그 글은 내 청년 시절의 소중한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을 겨냥하는 패륜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 이현주 목사는 그저 예수를 팔아먹는 크고 작은 보도방들인 한국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일에 분투했다. 그가 짓거나 옮긴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몇몇 노작들은 서남동 안병무 같은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내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민중신학자들이 내게 예수를 논증해주었다면 이현주는 내게 두런두런 예수를 들려주었다. 최악의 반동과 최고의 열정이 맞서던 시절, 그와 권정생(<강아지똥>을 지은) 들은 조용한 소금이었다.
10여년이 흘러, 전해 듣는 그의 근황은 나를 적이 답답하게 했다. 우주적 이치를 깨친 듯한 얼굴을 한 그는 건전함을 잃고 있었다. 건전함을 잃는다는 건 대개 지저분한 현실로의 투신을 말하지만 드물게는 현실을 멀쩡히 초월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깨우침이 현실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욕망의 충돌에 머무는 일을 비판한다면 올바랐지만 급기야 그 깨우침이 “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라는 오만한 중립주의에 이르자 나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가장 신중하게 그러나 가장 악랄하게 비판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내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는 어떤 놈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모두 다르며 폭력을 반대하는 일은 그 다름을 세심하게 따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폭력을 반대하는 이유가 폭력이 우리의 알량한 미감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폭력에 처한 구체적인 인간들과의 연대감 때문이라면 말이다. 수십년 동안 단지 미국에 꿇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죄없이 살해당하고 능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 읊조리는 건 폭력적으로 한가롭다. 그런 말은 단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그 처참한 현실과 철저히 무관함만을 지시한다.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의 80, 90년대와 같은 격변의 역사 속에서 인텔리들은 제 좌절감을 세상에 치환하여 모면하려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던 인텔리는 그 시도가 실패한 뒤 좌절감 속에 제가 생명이나 인간 같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빠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깨달음 뒤에도 여전한 오만함이다. 빠트렸던 문제들은 원래의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적으로 대체된다. 이제 그에게 정치적 변혁은 그저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다. 전에 그에게 생명과 인간이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었듯 말이다.
정치적 변혁을 배제한 생명과 인간의 탐구란 관념적 장난에 불과하며 생명이나 인간의 문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본디 출발점이라는 총체적 사실은 그들에게 애써 부인된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제 삶이 몹시 고단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 오늘의 안식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깨닫고 그 깨달음을 더욱 열심히 광고한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려는 싸구려 코미디언에서 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얼치기 도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공전한다. 과연, 내 존경은 회복될 것인가.김규항/출판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