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어떻게 변하니? 불변상의 스티븐 시걸"
타잔 행색의 톰 행크스와 팬티스타킹 신은 멜 깁슨이 선두에 나섰던 2001년 외화 퍼레이드도 몬스터 설리의 파란 꼬리를 끝으로 어느새 모퉁이를 돌고 있다. 별이라도 따다줄 듯 성대했던 예고편의 약속을 배신한 대작도 있었고 우리를 끝까지 어리둥절하게 한 종잡을 수 없는 영화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도 적지 않다. 전례없이 철든 왕자와 공주도 만날 수 있었고, 폭격하고 질주하는 영화의 스릴에 멀미가 날 만하면 부에나비스타 사교클럽과 카바레 물랭루주에서 여독을 풀 수도 있었다. 소년 빌리와 비욕의 ‘팬시 댄스’에 발 구르고 10대 소녀 공주와 런던의 노처녀, 괴짜 감독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한해 동안 우리에게 감격어린 수다와 농담의 재료를 아낌없이 선사한 외화들의 꾸러미를 묶으며, <씨네21> 마음대로 끼적거린 2001년 외화 비망록을 펼친다.김혜리 [email protected], 디자인 김연선
최고의 캐스팅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 최악의 캐스팅 <웨딩 플래너>
히치콕은 “연기자가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릴 수 있는 월트 디즈니가 부럽다”고 했다지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배우들은 원작자의 머릿속을 트레이싱 페이퍼로 베껴낸 듯한 생김새와 행동거지가 애니메이션 캐릭터 부럽지 않았다. 가상 캐릭터에 ‘몸’을 제공해 흥행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는 점에서는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도 감투상감.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르네 젤위거의 자기변주, 휴 그랜트의 둔갑, 콜린 퍼스의 자기패러디를 1/3씩 혼합한 고급 칵테일을 내놓았다. 반면, “이웃 세명에게 선행 베풀기”를 모토로 내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는 오스카 인증에 빛나는 케빈 스페이시, 헬렌 헌트, 할리 조엘 오스멘트를 모아놓고도 3단 발진에 실패해 결국 세 사람에게 나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웨딩 플래너>의 제니퍼 로페즈와 매튜 매커너헤이는 새알 초콜릿까지 동원해 운명적 커플임을 강변했으나, 근래 보기 드물게 어색한 ‘웨딩’이라는 뒷공론을 면치 못했다.
최고의 컴백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코폴라씨는 집요하기도 하지. 올해 가장 위풍당당한 컴백으로는 ‘스파이더 워크’라는 필살기를 선보인 <엑소시스트>, 고전적인 순간이동 마술을 시범보인 <히로시마 내 사랑>을 제치고, 오리지널 판에 무려 49분을 더하고도 덜 지루한 기적적인 개정판을 내놓은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뽑혔다. 10년 뒤 <지옥의 묵시록: 홀로그램 판>이나 <이것은 지옥의 묵시록이 아니다> 같은 제목의 새 버전이 나온다 해도 더이상 놀랄 사람은 없을 듯.
베스트 동물 연기상 <애니멀>
잡초를 가르며 그가 온다! ‘6백만불의 사나이’가 될 뻔했으나 가난한 과학자를 만난 탓인지, 각종 동물 장기를 이식받고 식탐, 발정기, 후각 등 동물들이 겪는 영욕을 남김없이 체험한 <애니멀>의 로브 슈나이더가 진짜 동물 및 <혹성탈출> 팀의 경합을 뚫고 낙점됐다. <캣츠 앤 독스> <스팟>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부상을 무릅쓰고 열연한 고양이와 개들도 물론 모두 천국으로!
미모로 보나 심성으로 보나 생활력으로 보나 <몬스터 주식회사>의 모범사원 설리와 <슈렉>이 공동 챔피언감. 작품 공헌도로는 설리의 ‘로빈’ 마이크 와조스키도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설리에게 수백만올의 털을 심느라 애니메이터들이 탈진한 탓인지, 지나치게 무성의한(?) 생김새가 결격 사유다. 최악의 몬스터는 <미이라2>의 스콜피온 킹. 아무리 쌈박질밖에 모르는 단순무식한 괴물이라지만 스콜피온과 프로레슬러 더 록을 그대로 짜깁기한 디자인의 발상이 어처구니없다, 떼로 등장하는 아누비스 부대의 재칼보다도 카리스마가 달린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최고의 패밀리 <빌리 엘리어트>
‘패밀리 비즈니스’의 벤처 가능성을 입증한 <하트 브레이커스>와 <스파이 키드>도, 한 가족의 신규 멤버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절차인지 파헤쳐 결혼적령기 관객의 심금을 울린 <미트 페어런츠>도, 같이 살 수 없는 사랑의 성숙한 예를 제시한 <유 캔 카운트 온 미>도, 1편에 이어 사려 깊은 아버지상을 만방에 떨친 <아메리칸 파이2>도, <빌리 엘리어트>의 늠름한 소년과 그의 가난하고 어눌한 가족만한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대처로 떠나는 아들을 으스러지게 안아올리는 늙은 아버지의 정거장 배웅장면은 액자에 넣어 간직하고 싶은 올해의 ‘가족사진’.
베스트 액션 <키스 오브 드래곤>
사건의 연쇄보다 옥탄가 높은 액션 시퀀스의 충돌로 동력을 공급한 영화 <키스 오브 드래곤>은, 그간 턱없이 얕은 무공의 상대들에게 지는 시늉을 하느라 객지에서 고생이 많았던 호걸 이연걸에게 드디어 합당한 예우를 바쳤다. 유람선 격투신을 비롯한 <키스 오브 드래곤>의 액션신은 이연걸의 초절정 개인기로 순수한 쾌감을 안긴다. 차점작은 산을 뒤흔드는 고강한 내공에 소환술과 공중 부양술, 애증의 파노라마까지 곁들인 인형 블록버스터 <성석전설>이다. 폭파 부문에서는 <진주만>의 우격다짐식 물량공세를 누르고, 재치있는 동선과 순간적인 무중력 상태 연출로 구경꾼의 숨을 멎게 한 <스워드피쉬>의 오프닝이 꼽혔다.
베스트 사운드트랙 <어둠속의 댄서>
<씨네21>에 매주 한장의 영화음악 앨범을 해설하는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씨가 올해 최고의 외화 사운드트랙을 묻는 질문에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어둠 속의 댄서>. 필름 가장자리 ‘트랙’ 안에서 효과음과 어울려 달리는 영화음악의 본성, 그와 연관된 사운드 디자인의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성기완 평론가가 지친 목소리로 덧붙인 추천사는 “비욕 만세!”.
가장 실망스러운 기대작<코렐리의 만돌린>
혹시 감독이 동명이인? 아니면 아주 비싼 농담? 존 매든 감독의 신작 <코렐리의 만돌린>은 우아한 균형미와 물샐틈없는 시나리오로 박수받은 전작 <미세스 브라운>, <셰익스피어 인 러브>과 발가락 하나 닮은 데가 없어 충격을 안겼다. <코렐리의 만돌린>은 배우의 헛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영화. 페넬로페 크루즈는 약혼자가 문맹임을 모르고 100통의 편지를 썼는가 하면, 니콜라스 케이지는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인물의 대사가 모두 영어로 처리된 가운데 영어를 영어로 통역하느라 애를 먹었다.
가장 사랑받은 공간 수영장
<졸업> <선셋 대로> 등 고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수영장은 2001년에도 주가를 높였다. 이곳에서 A.I.의 감정있는 로봇 데이빗이 절망을 뜬눈으로 목격했고 <차스키 차스키>의 꼬마가 아빠 상봉 예행연습에 몰두했으며 <갓 앤 몬스터>의 제임스 웨일은 사나운 꿈같은 삶을 수장했고 <투발루>의 주인공들은 유토피아를 향해 출범했다. 이 밖의 장소로는 동굴, 모텔, 경기장, 법정, 경찰서 등이 꾸준한 인기를 누렸고 겨울 흥행전 개막 뒤에는 화산고, 호그와트 마법학교, 강남의 비리 사학 상춘고가 일제히 개강해 극장가를 학원가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DVD가 고대되는 영화 <메멘토>
스펙터클을 안락의자에서 좋은 화질로 찬찬히 뜯어보고 싶은 이에겐 <미이라2>와 <이웃집 토토로>가, 스피커들에 둘러싸여 공연장 분위기에서 쿠바 재즈를 만끽하고 싶다면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 으뜸일 성싶다. 하지만 신 셀렉션(scene selection) 기능의 혜택을 실감해볼 만한 영화는, 많은 관객에게 검산의 두통을 안겨주고 많은 영화 기자에게 ‘조립설명서’ 작성의 수고를 안겨준 <메멘토>가 아닐까. 멜로드라마와 액션 부분이 자로 잰 듯 나뉘어져 있는 <진주만>도 같은 기능을 이용하면 입맛대로 즐기기 ‘편리한’ 영화다.
가장 동분서주한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
“대체 언제 ‘스타덤’ 기사를 써야 하는 거지?” 기자에게 이런 고민거리를 준 올해의 다작 배우는 브랜든 프레이저와 로버트 드 니로, 벤 애플렉이다. <일곱가지 유혹> 한편에서만도 수차례 헤어스타일과 체형을 갈아치웠던 프레이저의 수난은 처자식을 이끌고 온갖 CG 캐릭터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미이라2>로 이어지더니, <갓 앤 몬스터>에서야 대선배 이안 매켈런 곁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드 니로는 <미트 페어런츠> <맨 오브 오너> <스코어>로 노익장을 과시했고 벤 애플렉도 <진주만> <바운스> <레인디어 게임>에 얼굴을 비쳐 관객이 잊을 틈을 내주지 않았다.
베스트 에로틱신 <멀홀랜드 드라이브> <일곱가지 유혹>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침대에 누운 베티 옆에 다가온 리타가 스르륵 가운을 벗고 알몸으로 침대 시트로 파고드는 동성애장면,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또각또각 걸어 소년들 앞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 장면, <일곱가지 유혹>에서 엘리자베스 헐리가 가슴 팬 의상으로 브랜든 프레이저를 유혹하는 장면 등이 후보였으나 베스트는 <간장선생>의 엔딩 대목. “공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지키던 창녀 소노코가 간장선생 아카키와 배를 타고 가다 물에 빠지면서 훌러덩 바지가 벗겨진다. 바지를 잃어버려 엉덩이를 드러낸 채 배 위에 엎드린 소노코가 아카키의 품에 안길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류가 흐른다. 일부 몰지각한 페티시광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르네 젤위거가 소방관 봉을 타고 내려오다 엉덩이가 카메라를 향한 채 엉덩방아 찧는 장면을 꼽기도.
불변 스티븐 시걸 과 변신 덴젤 워싱턴
<엑시트 운즈>의 스티븐 시걸은, 우리가 그를 알아온 이래 변함이 없는 예의 ‘모나리자 미소’와 안마사 또는 담요를 터는 주부의 손길을 연상시키는 무심한 가격을 고집하며 “연기가 어떻게 변하니?”라는 그의 철학을 말없이 웅변했다. 한편 가장 큰 스타일의 전환을 성공시킨 연기자는 <트레이닝 데이>의 덴젤 워싱턴. <리멤버 타이탄>에서 저돌적이지만 건강한 박력을 지닌 풋볼 코치로 분했던 그는 <트레이닝 데이>에서 진물이 나도록 부패한 악귀 같은 형사로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였다. 그외, 한해 동안 냉탕과 온탕을 바삐 오간 배우로는 비열한 엘비스 프레슬리 숭배자로 나온 과 백악관 특별보좌관으로 분한 D-13이 몇주차로 개봉된 케빈 코스트너가 있다.
‘너 어느 별에서 왔니’ 상 <혹성탈출> 에스텔라 워런
그 별에서 그녀는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혹성탈출>의 에스텔라 워런은 마치 <파멜라 앤더슨의 V.I.P나 S.O.S 해상기동대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세트를 잘못 찾아온 미아처럼 보였다. 영화의 한 장면을 왠지 수영복 심사장처럼 보이게 하는 그녀는 <드리븐>에서 결국 일본까지 날아가 수영장신을 만들어냈다. 차점자는 <베가번스의 전설>의 윌 스미스.
베스트 드라이버<스트레이트 스토리> & 워스트 드라이버 <분노의 질주>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앨빈 스트레이트는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옆 주에 사는 동생을 방문하는 데에 6주가 걸려 가히 안전운전 표창감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다만, 무면허자가 잔디 깎는 기계를 승용으로 개조 운행하는 행위가 미국 도로교통법에 저촉되지 않냐는 의문은 제기됐다. 최악의 운전자는? 물론, <드리븐>의 ‘선수’들과 달리 스폰서도 경주 트랙도 없이, 자동차와 한몸이 되어 폭주와 절도를 일삼은 <분노의 질주>의 도미니크다.
베스트 카메오 <나의 즐거운 일기>의 제니퍼 빌스
한가롭게 로마 거리를 거닐다가 스쿠터를 탄 난니 모레티 감독에게 잡혀 졸지에 푼수 같은 수다를 받아줘야 했던 <나의 즐거운 일기>의 제니퍼 빌스가 동정표를 보태 최고 득점했다.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을 호평했다가 모레티에게 고문당한 그 평론가는 현업 종사자가 아니었기를. <슈렉>에 뜻하지 않게 동원돼 친정을 욕되게 한 피노키오 등 디즈니 캐릭터들과 오랜 도피 끝에 어렵사리 짬을 내 출연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고작 “화장실이 어디죠?”라는 질문을 받은 샐먼 루시디도 후보에 올랐다.
최고의 제목 <금발이 너무해>
영어 선생님들의 분노를 살 법한 그릇된 발음의 제목(<스워드 피쉬>)과 영 껄끄러운 음독(<다운 투 어쓰> <웨어 더 머니 이즈>)의 외화 타이틀 가운데 센스와 애교가 솔깃했던 제목은 Legally Blonde를 영화 내용과 어긋나지 않게 번역한 <금발이 너무해>. <귀신이 온다>도 유사한 원제를 가진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영화다.
베스트 최저 개런티 연기 <캐스트 어웨이>의 배구공 윌슨
이론의 여지도, 라이벌도 없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표류자 톰 행크스의 옆자리를 지킨 의리의 배구공 윌슨이 최소한의 메이크업만으로 완성한 탁월한 표정 연기로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었다. 기타 소품으로는 <천국의 아이들>의 운동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리타 헤이워스 포스터, <아멜리에>의 숟가락, <메멘토>의 폴라로이드 카메라,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님부스 2000 빗자루가 관객이 탐낸 아이템들이었다.
최고의 커플 & 최악의 커플 <한니발>
베테랑과 루키, 수다쟁이와 근육질. 실력파 배우에게 버디무비의 버디로 캐스팅되는 것보다 하품나는 일도 없을 거라고? 그러나 의 형사 로버트 드 니로와 방화수사관 에드워드 번즈는 끊임없이 서로의 콤플렉스와 불안을 드러내며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가는 두 남자로 분해 멋진 한쌍을 이뤘다. <브랜단 앤 트루디>의 도둑과 영화광 커플, <쁘띠 마르땅>의 알츠하이머 노인과 소아암 환자, <파인딩 포레스터>의 은둔자 스승과 천재 제자도 2001년을 대표하는 듀오들. 물론 호흡면에서는 <키드>의 브루스 윌리스와 그를 방문한 어린 시절의 브루스 윌리스 짝을 당해낼 도리가 없겠지만. 반면 최악의 커플은 <한니발>의 앤서니 홉킨스와 줄리언 무어. 이 커플이 성사되어 노년을 함께한다면 추억담이 어찌 흘러갈지. “여보, 당신이 도끼로 손목을 친 날이 그 남자 뇌를 요리한 날이었나요, 그 다음날이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