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사가 무엇일까요, 라는 싱거운 퀴즈가 있다면, 정답은 국제영화제다. 우리의 오래된 꿈은 관객으로 영화제 구경 가는 것이다. 데일리 만드느라 새벽 두세시에 퇴근해, 아침에 눈비비며 헐레벌떡 인터뷰 장소로 가다보면, 깔깔거리며 극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귀족계급처럼 보인다. 프레스카드라는 걸 차고 있지만 극장에 가는 건 귀한 경험이다. 올해 부산영화제 때는 누군가 여섯편을 봤다고 말하자, 와 그렇게 많이 봤어, 라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짬을 내 지난 12월7일부터 열렸던 광주국제영상축제에 3일 동안 다녀왔다. 국내의 다른 국제영화제의 열기를 즐겁게 체험한 사람에게라면, 이건 영화제도 아니다. 예산이 다른 영화제의 10% 수준이고, 대학 시험기간과 겹친 일정도 불우하며, 그나마 홍보도 제대로 안 돼, 상영관들은 안쓰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몇편 안 되는 한국영화 상영관은 달랐다지만, 내가 간 상영관은 30명 이상 찬 적이 없었다(게다가 극장들은 유난히 컸다).
그런데 나는, 행복했다. 우선, 영화가 좋아서 행복했다. 영화제는, 우리가 보지 않았음을 숨기고 싶은 영화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광주영화제는 그런 영화들이 특히 많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냥 관객이어서 정말 좋았다.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니, 한편 보고 나와 숙소에서 한숨 자고 어슬렁거리다 또 보고, 하는 게 약간 어지러울 정도로 좋았다. 극장이 썰렁한 건 줄 안 서도 되니 오히려 반가운 일이고, 잦은 자막 실수도 귀여워보였다. 서울에서 고생하는 후배들이 눈에 밟히지 않았다면, 다만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광주에서 본 <카이에 뒤 시네마 50년>이라는 다큐멘터리에는 “취향이 최상의 지성이다”라는 로트레아몽의 말이 인용된다. 언젠가 영화비평을 쓰는 후배에게 “비평가란 자신의 취향과 비평적 기준을 일치시켜가는 사람”이라는 말을 해놓고, 엉겁결에 멋진 말을 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나란히 놓고 보면 앞의 말이 더 멋지지만, 여하튼 나는 그 말을 여전히 믿는다. 누벨바그의 역사가 웅변하듯, 취향의 당당한 옹호야말로 비평을 그리고 영화를 살아 있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영화에 따뜻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의 영화엔 몇 가지 말로 평가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의 땀이 스며 있고, 우린 그걸 가까이서 본다. 그러나 우리의 취향은 때로 “이건 쓰레기야”라고 외친다. 태도와 취향은 종종 서로 등을 돌린다. 태도는 언제나 도덕률처럼 버티고 있고, 취향은 끝내 감춰지지 않는다. 그때 우린 괴롭고, 그냥 어슬렁거리는 관객으로 남고 싶게 된다. 훗날 <씨네21>을, 태도와 취향 사이에서 거의 불가능한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 사람들의 기록으로 읽어주는 사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공상을 하며 광주를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