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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드라이브>, 악몽의 린치 타운
2001-12-15

악몽의 주술사 데이비드 린치, 그 블랙홀에의 초대

데이비드 린치의 최근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마지막은 스페인어로 사일런스를 의미하는 ‘실렌지오’로 끝을 맺는다. 침묵. 붉은 커튼 밑에서 ‘밴드도 없다. 오케스트라도 없다’며 립싱크로 크라잉을 애절하게 부르는 여가수. 그리고 영화 <블루 벨벳>에서 여장한 남자가수가 부르는 또다른 립싱크 노래 <인 드림스>의 강렬함. 허공에 맴도는 가짜 립싱크처럼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끝없는 공허의 늪을 헤매는 백조의 연가 같은 것이다. 동시에 그 블랙홀의 끝은 인간의 가장 깊은 무의식의 진피에 슬며시 다다른다. 그러므로 린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10층짜리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 극장문을 나서면 그뿐이겠지만, 그 전에는 누구든 일단 현실과 논리라는 망루에서 한번은 아찔한 추락을 감내해야 한다. <이레이저 헤드>나 <로스트 하이웨이>에서처럼 머리가 댕강 잘리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반쯔음은 미쳐 실성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거나.

태초에 악마적 비정상성이 있었다

린치의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악몽을 꾼 것 같다던가 아니면 피부 밑에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은 징그러운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린치의 영화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관객에게 악몽의 주술을 거는 비정상성에서 발원한다. 잘려진 귀, 벌레같이 꿈틀거리는 기형아, 악마의 얼굴로 변하는 아버지, 난쟁이. 그것이 변형된 신체이던 악마에게 넋이 나간 영혼이던 린치의 비정상성은 관객을 속이는 함정인 히치콕의 맥거핀과는 달리 근대적 사회의 균열의 징후를 보여주는 얼룩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괴이한 존재들은 린치의 기묘한 시각적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린치 타운의 핵심이기도 할 것이다. 린치는 처음부터 그랬다. <이레이저 헤드>는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지우개 머리로 밀어버리고 사람들의 ‘베이비’에 대한 모든 기호학을 깨부수는 벌레 같은 기형아의 이미지를 창조해놓았다. (스탠리 큐브릭은 심지어 <샤이닝>을 만들 때 원하는 분위기의 표본으로 스탭들에게 <이레이저 헤드>를 틀어주었다.) 이런 그를 멜 브룩스가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린치를 ‘화성에서 온 제임스 스튜어트’라고 칭한 뒤 할리우드로 초청해 <엘리펀트 맨>의 연출을 맡겼다. 이 영화 역시 19세기에 실존했던 존 머릭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존 머릭은 끔찍한 외모를 지닌 기형적인 인간이지만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마음이 지순하다. 존의 끔찍한 외모는 오직 정상과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구경거리 사회’로서의 근대적 세계와 대비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안온하고 동화적인 오즈의 세계도 일단 린치가 <광란의 사랑>식으로 풀어가게 되면 토사물 위에서 루비구두의 뒷굽을 치는 타락의 장소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듯 린치의 초창기 영화들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세상에서 음습한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독기를 품고 관객을 유혹한다. 린치의 영화에서 이러한 비정상성의 과잉은 결국 ‘우리의 정상’은 무엇인가 하는 혼돈의 극한까지 관객을 몰아넣는다. 평화로운 마을에 숨겨져 있는 <이레이저 헤드>의 기형아처럼, 린치의 비정상성은 어느덧 진술과 구체적 실체 위에 집을 지었다고 믿는 우리의 의식을 밑바닥에서부터 갉아먹는 것이다.

린치 타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이후 린치의 영화 필모그래피는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로 이어지면서 아주 조용한 시골 소읍에서의 잔인한 살인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관객을 미스터리 속으로 밀어넣는 체험을 반복해서 선사하였다. 컬트라기보다는 점점 주류영화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던 이 시기의 영화들은 외관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잔잔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도록 되어 있는 어떤 소읍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잘린 귀가 발견되고 미의 여왕인 로라는 타살체로 발견된다. 린치는 영화 초반에 ‘잘린 귀의 주인은 누구일까?’, ‘로라의 살해범은 누구일까?’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낚아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은 무한으로 반복되는 도돌이표의 변주를 할 뿐이다. 린치는 ‘관객의 호기심을 무한 반복으로 변주하다보면 결국은 미스터리를 창조한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다.

결국 린치는 인간의 무의식과 금기의 세계로 관객을 실어나른다. 그것은 동시에 린치의 전매특허 같은 붉은 커튼 뒤 혹은 블루 벨벳 밑의 세상을 들추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곳 린치 타운에서 미국의 중산층의 가치관은 어느덧 신경즉적인 강박의 그물에 걸린 팽팽한 성적 긴장으로 치환된다.

<블루 벨벳>에서는 남편과 아이를 볼모로 잡힌 여가수가 암흑가 두목과 성적으로 피학적, 가학적 관계를 맺는가 하면, 트윈 픽스에서는 아버지가 딸의 육체를 탐하는 근친상간적인 콩가루 집안의 퍼레이드가 더욱 대담하게 펼쳐진다. 결국 린치 타운은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내면은 외면의 질서가 따라잡을 수 없는 매우 혼란되어 있고 위험한 마각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호흡기를 단 사이코 악당처럼 린치 타운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 그리고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려는 프로이드의 욕망의 제1원칙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 심리적 갈등의 결과가 살인과 음모라는 의식적 행위로 표출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린치 영화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사각지대에 놓인 린치 타운’이라는 제하의 광시곡의 연속이었다.

정체성을 파괴하라, 시공간을 부숴라

그러나 <로스트 하이웨이>를 기점으로 린치의 영화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물리적인 면만 보아도 이후의 린치 영화에서는 조그만 소읍 대신 불야성의 도시 LA가 자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윙키스 레스토랑에 언젠가 와본 것 같다고 호소하는 린치의 주인공들처럼 LA는 마치 언젠가 와본 것처럼 그러면서도 지극히 낯선 장소로 변모해갔다. 그러므로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LA는 더이상 우리가 아는 어떤 곳이 아니다. 바로 그곳에서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주인공 프레디는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감방에 갇혔는데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면서 자동차 정비공 피트로 바뀌어버린다. 바로 그곳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베티는 카밀라를 사랑하는 다이안이란 여자로, 리타는 감독 아담과 사랑에 빠지는 다른 여자 카밀라로 바뀐다. 카프카의 <변신>의 모티브를 생각나게 하는 이러한 설정은 정체성 즉 육신의 뒤바뀜을 통해 관객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꽈배기해버린다. 이제 린치는 자신의 영화를 이색적인 구경거리 정도의 컬트에서 완벽하게 제 색깔을 내는 무르익은 본능의 게임으로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린치의 영화에서 내가 누구이고, 현실은 무엇이며, 무엇이 옳고 그르냐 하는 질문이 어떻게 유효할 것인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프레드의 비디오가 집 밖에서 집 안으로 향하듯 후반기의 린치 영화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영화인 동시에 논리적으로 내면이 외부가 돼버리는 무한대의 뫼비우스 띠 위의 질주이기도 하다. 이제 린치의 디졸브는 말 그대로 현실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한 분해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제 린치의 팬숏은 영겁의 미궁으로 가는 안내자가 된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더이상 린치 타운으로 상징되는 기호 체계의 겉면을 영화안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오히려 시간과 공간의 초월한 내부의 자기 자신 즉 또다른 도플갱어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대담함과 잔인함을 선보인다. 중력처럼 작용하는 논리의 자장을 이겨내고 마침내 완벽하게 무의식에서 나온 악의 꽃을 피운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수 린치

데이비드 린치는 컬트영화 감독에서 주류영화 감독으로 부상한,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미국영화의 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다. 초창기 <이레이저 헤드>나 <사구> 등은 소수의 마니아만을 지닌 컬트물로 인정받았지만 <트윈 픽스>에서 바로 이 컬트적인 것이 TV를 통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평론가 짐 콜린스의 말대로 린치의 <트윈 픽스>는 “공포영화, 경찰 시리즈, 공상과학류, 연속극 등의 전통적인 방식을 종합한 것”이다. 이제 린치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정상성, 근대성, 휴머니즘의 기치를 든 모더니즘의 입장에서는 괘씸죄에 걸려 마땅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감독이 된 것이다.

매일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늘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단추로 꽁꽁 동여맨 그의 외모와 사생활은 정서적 변비상태인 완벽주의자로, 물활론적인 이성과 직관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 보이는 트윈 픽스의 수사관 데일 쿠퍼(카일 맥라클란 분)과 유난히 닮아 보인다. 그런 그가 근자에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함게 개봉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처음으로 G등급(모든 연령 관람가)의 영화를 만들고 밤하늘의 맑은 별 같은 서정적이고 담백한 화면을 펼쳐 보였다. 디즈니와 데이비드 린치의 이 이질적 조합은 시속 4마일의 속도로 미국이란 나라를 되돌아보고 가족간의 사랑과 진정한 인간애에 점잖은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어쩌면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세상이 더욱 원숙해지고 있고 사실 그가 그리고 있는 지독한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피층을 이루는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세상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악몽으로 점철된 ‘멀홀랜드의 세상’을 뫼비우스 띠의 꽈배기를 풀면 다시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직선주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페데리코 펠리니와 같은 날 태어났으며, 어찌 보면 펠리니의 풍부한 상상력과 히치콕의 관음증을 한자리에 섞어버린 것 같은 그는 짐 호버먼의 평가처럼 스필버그의 해독제로서 미국식 작가주의의 또다른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진심으로 데이비드 린치의 세상을 즐기시기를. 데이비드 린치는 어쩌면 마약 한방의 도움없이도 현실의 정교한 논리적 그물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이 메마른 시대의 마지막 최면제일지도 모른다. ▶ <멀홀랜드 드라이브>, 악몽의 린치 타운

▶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정신분석학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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