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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0]

에필로그

아직도 먼 남도 유랑길 2001년 11월7일 날씨 맑음.

양수리에서 촬영이 끝나고 다음주에는 선암사에서 유랑을 떠나는 장승업을 찍는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아마도 어쩌면 겨울촬영 유랑길에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이 일기가 너무 길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 촬영장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의 정말 일부만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것들은 일부러 지나쳤다. 영화평에서 여러분들이 읽은 대부분의 그럴듯한 말들이 현장에 관한 창작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영화의 지식에 대해서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실 영화의 메커니즘은 구체적인 과정을 잘 모르면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정확하게는 옆에 서 있어도 모른다. 영화 현장에 관한 영화기자들의 기사가 대부분 유사한 것은 그들이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카이에 뒤 시네마> 364호에서 ‘촬영현장 특집’호를 내면서 책임편집을 한 알랭 베르갈라의 말이다. 알랭 베르갈라는 모든 영화는 자기의 촬영현장 방법을 갖고 있다, 고 단언한다. 자크 리베트는 “진정한 주제란 그 영화를 찍는 현장의 방법에서 태어난다”라고 말한다. 나는 더 배워야 할 것이다. 떠나면서 감독님에게 아직 종결되지 않은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직 고민중이라고 하신다. 지금 시나리오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장면 # 170 안개 낀 벌판, 겨울, 장승업 54∼55세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홀연히 길을 가는 승업.

유장한 시조창이 깔린다.

(자막) “화흥과 취흥의 자유인이라고 알려진 장승업. 하지만 그의 생은 자신을 옭아매는 세인의 평가와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외로운 싸움이었을 뿐이다

잦아드는 시조창에 이어 신수제천이 들린다.

차례로 보여지는 오원 장승업의 그림과 함께 떠오르는 엔드 크레딧

나는 촬영 도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모두가 다른 마지막을 기대하고 있었다.

(최민식씨와의 인터뷰) “글쎄요, 제 생각에는 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시장통에서 민초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들과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다 벗어던지고 훌훌 가볍게, 무겁게 가는 건 장승업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가볍게, 정말 신선처럼 훨훨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김선두 선생과의 인터뷰) “왜 기록이 안 남았을까, 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예로 이중섭 선생님이 계시지요. 한국전쟁 당시 병원에서 행려병자 취급받으면서 한달 동안 방치되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워낙 방랑벽이 심했으니까 객사했을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지막이 이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여태까지의 자기에 대한 부정. 그 부정을 했을 때 어떻게 나올 것인가, 거기서 나왔으면 합니다.”

(주병도 미술감독과의 인터뷰) “실종이라는 게 참 시적인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실종하느냐, 입니다. 태연하게 죽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잔인한 이야기지만 아마도 아무것도 제대로 안 되어서 실종되었을 것입니다. 그림도 안 되고, 나라도 안 되고, 나이를 먹으니 연애도 안 되고, 아마도 그냥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게 어디서 짠, 하게 올 것인가? 결국에는 그림입니다. 시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장승업은 화가니까. 그걸 어떻게 다룰지 정말 그 마지막 장면을 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과의 인터뷰) “왜 사라졌을까? 그게 미스터리입니다. 나도 나름대로 추리해보았어요. 나도 내 한계를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거기서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 나온 겁니다. 환경을 탓하면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은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나는 장승업이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십이 넘어서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면서. 내가 있고 그림이 있는 건데, 그림만 있고 내가 없다면 내가 해놓은 것이 없으니, 장승업이 자기가 자기를 발견했을 때, 나는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하야시라는 일본기자가 장승업은 진경산수를 그리러 금강산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 가서 에이즈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 집안에 그린 그림과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아무도 그 그림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최고 걸작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림들과 함께. 그렇게 세인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죽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장승업은 자살한 게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합니다. 왜 자살을 했을까?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자기가 그린 만큼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되었을 때 그는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클라이맥스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이끄는 위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장승업에게 좀더 객관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 장면이 결국에는 마지막에 촬영될 것이라고 짧게 말했다. 그냥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금보다 더 가까이 장승업의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취화선 팀은 그 장승업의 마지막 의미를 찾기 위해서 남도 벌판 유랑길을 떠나 있는 중이다. 영화는 계속된다.

後記, 또는 이어질지 모르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序文

나는 현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쓰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나 가장 큰 도움은 그들이 정말로 현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서 배울 때이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자리에 기어이 버티어 서서 끝까지 지켜본다. 그러다가 아무도 보지 못한 실수를 발견하는 순간 오케이가 나려고 하자 카메라 바깥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엔지를 내고 만다. 그리고 욕을 먹어가며 그걸 뛰어들어가 고친다. 나는 그런 대목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현장은 정말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이다.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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