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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맥보잉 보잉
2001-02-23

월트 아저씨는 죽고 UPA는 살다

얼마 전 밤에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가게 돼 비디오로 출시된 <판타지아 2000>을 빌려 봤다. 극장에서 두번이나 본 작품이지만 커피 한잔 끓여서 집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보는 <판타지아 2000>은 정말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 전체 에피소드가 모두 재미있고 즐겁지만, 그중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영상화한 에피소드이다. 음악이 좋기도 하지만, 이른바 ‘디즈니 화풍’을 벗어난 그림체와 간결하면서 발랄한 표현이 좋기 때문이다. 특히 그 영상이 디즈니가 생전에 가장 싫어했던 ‘UPA’의 작품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색채나 움직임, 사운드면에서 탁월하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결같은 화려함과 유연함에 곧잘 지겨움을 느낄 때가 많다. 어느 작품을 봐도 늘 ‘디즈니’라는 상표만 보이고 애니메이터나 감독의 개성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애니메이션은 다채롭긴 해도 눈에 쏙 들어오는 일품요리는 없는 호텔 뷔페 식당의 메뉴를 연상시키곤 한다.

월트 디즈니는 우리에게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자상한 아저씨의 인상으로 남아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애니메이션을 구경거리에서 작품의 경지로 승화시킨 공로자로 높게 평가하는가 하면, 할리우드 내의 좌파를 감시하기 위한 FBI의 비밀 정보원이었다는 설부터 ‘매카시 선풍’ 때 동료 영화인들을 내쫓는 데 앞장섰다는 등 자상한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디즈니는 애니메이터가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권위적인 성격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41년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이 노조를 설립하려고 파업을 일으키자, 가차없이 이들을 내쫓았다.

스티븐 보스토, 존 휴블리, 프랭크 타실린, 필립 던컨, 폴 소마 등 한창 창의력과 열정이 넘쳤던 이 젊은 애니메이터들은 낮은 임금과 높은 노동시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늘 자신의 방식만 따를 것을 고집하는 디즈니의 ‘독재’를 참을 수 없는 상태였다. 회사에서 쫓겨난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란 이름의 프로덕션을 세웠다. 이후 UPA는 실험성과 창의성의 상징으로 70년대까지 명성을 떨쳤다. 보스토와 휴블리를 비롯한 젊은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하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애니메이션이 지닌 표현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살리겠다는 것이었다. <백설공주>나 <아기사슴 밤비>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보듯 극중 캐릭터가 실제 사람처럼 움직여야 할 이유도, 모든 배경과 인물이 항상 실사와 닮아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창작정신이다.

이후 UPA의 식구들은 과감하게 배경을 생략하거나 기하학적인 선으로 단순화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들의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들은 곱고 예쁜 모습 일변도에서 벗어나 모딜리아니나 마티스 같은 후기 인상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때로는 뾰족한 코에 시사만화 주인공 같은 평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등 그리는 작가의 개성을 마음껏 담도록 했다. 내용도 그림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정치적인 메시지나 사회풍자를 담는가 하면 살인이나 불륜 같은 디즈니에서는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제럴드 맥보잉 보잉>(1950)과 <루티 투트 투트>(1952)는 그들의 애니메이션관이 그대로 나타난 초기 걸작들이다.

UPA가 등장한 지 57년이 흐른 지금 디즈니사가 자랑하는 걸작 <판타지아 2000>의 애니메이터들은 <랩소디 인 블루>에서 UPA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했다. 죽은 ‘월트 아저씨’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 더: UPA의 핵심 멤버 중 하나인 존 휴블리는 55년 부인과 함께 UPA를 떠나 독립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뒤 그는 방송사에 길이 남는 걸작 어린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바로 <세서미 스트리트>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