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플 총? 라이플 총 없이는 못 가지. 구두나 옷이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희망마저 사라져도 우린 라이플 총만은 놓지 않아.”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중에서

0. 서랍 안에 숨겨둔 <바카디8>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1/3밖에 마시지 않은 거란 말이다. 단골 주류백화점 사장님이 권해준 술인데, 진짜 코르크마개를 쓴 예쁜 병과 달리 맛은 저어스러웠지만 여하튼 돈 주고 산 술이란 말이다! 파이재료로서 건포도와 호두를 넣어두기 위해서라고 거짓말하며 어머니에게 럼주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녀는 절대 모른다고 증언하였다. 그녀의 평소의 행태로 볼 때 내 음주를 염려한 거짓 증언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여기에서 없어진 술에 대한 집착을 지나치게 보일 경우 자칫 주정뱅이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후퇴하기로 하고 물밑 자력 수사를 벌였으나 그 깜찍스런 병은 사라져서 죽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날 사준 건 고맙지만 너는 더이상 술을 마셔서는 안 돼’라는 신의 측은지심으로 그의 옷자락 안에 숨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한동안 버림받았던 에반윌리엄스와 와일드터키의 ‘왜 우리를 마셔주지 않는 거지!’식의 복수인가, 아니면 달에서 잠시 치즈 공판권 교섭을 위해 방문한 외계인들이 관광시간에(한심한 인류 샘플로) 내 방을 뒤지다가 그것을 맛본 뒤 마음에 든 나머지 지구에서의 전리품으로 획득해 갔다던가… blah blah blah… 잠시 고민해보았으나 꼭 한가하기 짝이 없는 내 따위의 머릿속에서나 나올 생각이라 일단 이런 유의 문제는 멀더에게나 맡기리라 마음먹으며 얼른 구겨서 머릿속에 처박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데크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그는 닭을 안고 있어, 그녀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갈색 닭을―.

1. 그녀에의 반함에 차마 반反할 수도 없어서 갈색 닭을 안고 헛간 귀퉁이에 서 있는 클리프, 20대 초반에 가엾고 구질구질한 남자아이 연기에 한 재주 하던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서글픈 모습에서 왜 닭을 안고 있는지 같은 건 알 수 없다. 여하튼 살며시 팔로 닭을 안은 크리스천 슬레이터, 그리고 얌전히 안겨 있는 닭의 모습은 왠지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터질 것처럼 느껴져 눈을 슥 부볐다. 아무도 그를 안아주지 않아서 닭을 안고 있는 거야. 포옹, 포옹, 포옹. 나는 당신의 전부를 원하지 않아, 단지 우리 모두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 그러니 나를 잠시만 안아주세요. 그렇게 욕심없는 체 말하지만 뛰는 심장을 가진 한 모두 그 이상을 바라게 되어 있어, 나를 조금 더 안아주세요, 늘 안아주세요, 늘 나만을 안아주세요. 로 발전해버리면 원하지 않았던 미움과 증오와 슬픔의 곁가지가 생겨나. 그래서 나는 거북을 안고 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꿩 대신 닭, 닭 대신 거북, 이처럼 근근하고도 유구하게 이어져가는 삶.

2. 점점 고독의 수위는 차오르고 그것이 설령 위험 한도를 넘어가도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살아가지는 않을 테다, 변명과 머쓱한 망각에의 의존과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와 ‘beyond my control’ 같은 면구스러움 따위는 맞아죽어도 싸다. 사랑love은 다섯 글자로 하면 클리프cliff이고, 네 글자로 하면 또다른 남자의 이름인 <사랑의 랩소디>. 그렇고 그렇다는 건 알겠는데 다만 나는 짜증이 난다는 거야, 그러니 그런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는 것뿐, 다만 영원히 거북을 안고 석화되겠다는 것뿐. 신도 악마도 거물급만 관리하기에 잊혀진 채 도맷금으로 넘어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인증받고.

3. 그리하여 마침내,

클리프는 닭을 놓고 라이플로 그 남자를 쏴 죽였고

우리는 마음을 죽였으며

비디오는 라디오 스타를 죽였고

디뷔디는 비디오 스타를 죽였네.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서식중. 정확한 거처 불명. 키워드는 와일드터키, 에반윌리엄스. <누가 뭐래도 버번은 007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email protected](하트브레이커는 <하트브레이커스>가 아니라 하트브레이커 ‘더 키드’ 숀마이클님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