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영화 제목이 너무 밍밍하고 붕 떠 있으면 그거 반드시 지독한 문예물이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예술품이라는 말이다. <꽃섬>이 그랬다. 꽃섬, 花島, 하나시마, Flower Island, 아무리 자연언어의 옷을 갈아입혀 봐도 밍밍하다. 과연, 영화는 내 공리주의적 영화관(무엇보다도 영화라는 대중예술 장르는 보는 동안 즐거워야 한다는,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아야 한다는)을 대뜸 배반하고 있었다. 처음 20분 동안 나는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사실 이런 경솔한 말버릇은 고쳐야 한다. 이태복씨나 김근태씨처럼 참혹하게 고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고문당하는 기분’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낯부끄럽다). 이 영화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절망스러웠다(‘절망’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진짜 절망이 뭔지도 모르는 치가 ‘절망’ 운운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조심하겠다). 그냥 나가버릴까? 일행이 없었다면 나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행 중에는 내가 ‘사부’로 모시는 분이 계셔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상영 도중에 자리를 뜨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결례일 뿐만 아니라 내 사부님에 대한 결례도 될 터였다. 사태는 점점 나아졌다. 시간이 내 편이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이 영화의 결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몰입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꽃섬>은 세 여자가 남해시 앞바다에 있다는 꽃섬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시쳇말로 로드무비다. 옥남(서주희)은 옌볜 아줌마 같은 순박함을 지닌 30대 여성이다. 그녀는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기 위해 늙은 남자와 매매춘을 하다가 남자가 복상사하는 바람에 남편에게 들통이 났고, 그 결과로 강요된 외출을 실천하는 중이다. 꽃섬에는 그녀의 ‘천사 친구’ 영란이 산다. 옥남은 슬픔도 괴로움도 없다는 그 섬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남해행 버스를 탄다. 그녀는 버스 안에서 혜나(김혜나)라는 10대 소녀를 만난다. 결손 가정에서 막 자란 혜나는 자기를 낳은 여자(원한에 찬 이 아이는 제 어머니를 이렇게 부른다)를 만나보기 위해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남해로 가는 중이다. 옥남과 혜나는 눈 덮인 산중에서 죽어가던 유진(임유진)을 구한다. 뮤지컬 배우 유진은 설기저암(말이 몹시 어렵다. 아무튼 혀와 관련된 암인 듯하다)으로 혀를 잘라낼 처지가 되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마음먹고 그 결심을 실천하고 있던 차다.
나는 영화 속의 세 여자가 결코 꽃섬에 다다르지 못하리라고 지레짐작했다.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 모든 불행을 잊을 수 있는 곳은 현실 속에 존재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마약류는 빼놓고. 그러면 꽃섬은 마약이란 말인가, 하고 나는 한순간 생각했다. 아무튼 꽃섬이 그런 곳이라면, 영화 속에서 꽃섬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나는 내처 생각했다. 특히 남해행 버스를 탄 옥남과 혜나가 눈 덮인 산중에 버려졌을 때 그랬다. 꽃섬은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 세 여자는 내 기대를 배반하고 결국 꽃섬에 다다랐다.
남해행 버스의 운전기사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북쪽의 고향을 찾아 가버렸을 때, 나는 이 영화가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꽃섬에서 영란의 도움을 받아 유진이 승천(이겠지, 아마?)하는 끝머리 부분의 장면을 보라. 이 황당무계한 장면은 <어린 왕자>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뱀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린 왕자를. 그러나 <꽃섬>이 판타지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다른 한편 극도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남해의 허름한 나이트클럽 구석자리에서 세 여주인공과 얘기를 나누는 게이 뮤지션들은 조금도 배우 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혜나 어머니의 친구라는 박희진도 그렇다. 배우 같지 않다거나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은 연기가 서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연기가 완벽해서 실제 장면 같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감지했겠지만, 게이 뮤지션이나 박희진이 등장하는 장면은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처럼 리얼리티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꽃섬>은 극도의 판타지와 극도의 리얼리티를 한 몸에 담고 있다. 그 판타지와 리얼리티는 서로를 도드라지게 한다. 판타지 때문에 리얼리티는 더 핍진해지고, 리얼리티 때문에 판타지는 더 몽환적이 된다. 현실과 몽환의 삼투 속에서 <꽃섬>은 단편영화나 연극의 분위기를 닮아간다.
이런 과격한 형식 실험을 동반한 문예물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쉬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분리해 따져 보자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낯선 내용보다는 낯선 형식에 더 힘들게 적응한다. 예술이든 예술의 포즈든 그런 형식의 새로움이 클수록, 향유자의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다. 예컨대 이인성의 소설이 그렇듯. 그리고 <꽃섬>이 그렇듯.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