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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판매량으로 본 일본 게임산업
2001-02-23

차라리, 자본주의를 믿자

게임이 파친코 못지않게 대중적인 일본에선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올해의 게임’을 뽑는다. 인기란 건 어찌 보면 허망한 것이고, 실속있는 건 판매량 순위다. 일본에서 지난해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국민 게임’으로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7>으로, 340만장 팔렸다. 다음은 <파이날 판타지9>인데, 270만장이나 팔렸지만, 목표보다는 100만장 미달이라고 한다. <포켓 몬스터 금> <유희왕 듀얼 몬스터 4> <포켓 몬스터 크리스탈 버전>이 3∼5위를 차지했는데, 모두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보이’용 게임이다. 다음으론 <마리오 테니스64>(N64), <유희왕 듀얼 몬스터3>(GB), <슈퍼 로봇 대전>(PS), <별의 카비64>(N64), <마리오 파티3>(N64) 들이다.

판매 10걸을 보니까 당장 드는 생각이 ‘새로운 게임’의 몰락이다.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날 판타지>는 이미 7편, 9편이 나올 정도로 노쇠한 게임이다. 여전히 빼어난 작품인 건 틀림없지만, 예전의 영화가 없이도 이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는지 장담하긴 어렵다. 다른 것들은 더 심하다. 더이상 게임으로서의 발전을 찾기 힘든 <포켓 몬스터>의 후속작들이 두편이나 들어 있고, 뛰어난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긴 하지만 전작보다 나아진 거라고는 카드 종류가 늘어난 것뿐인 <유희왕>도 두편 들어 있다. <슈퍼 로봇 대전>은 2차, 3차, 4차, 신슈퍼, F전편, F후편에 이어 ??까지 숨가쁘게 나온 대표적인 ‘울궈먹기’ 게임이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나올지, 아는 건 제작사 ‘반프레스토’뿐이다. <마리오 파티3>은 닌텐도의 인기 캐릭터들이 모두 출동해서 벌이는 버라이어티 파티 게임이고, <별의 카비> 역시 예전부터 줄곧 내던 플랫폼 게임이다.

왜 새로운 게임을 안 만드는 걸까? 제작사 입장에서 할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회사라도 만들 때마다 ‘명작’을 내놓을 수는 없다. 솔직히 ‘명작’까진 아니더라도 ‘준작’이나 ‘수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유명 제작사, 예를 들어 <파이날 판타지>의 스퀘어 같은 경우, 다른 회사가 만들었다면 상당한 찬사를 받았을 만한 게임도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며 욕을 먹고 묻힌다. 이름값을 이상하게 하는 것이다. 큰 회사 작품일수록 제작비도 높은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을 당하면 큰 타격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팔릴 게임, 인기 시리즈에만 매달리게 된다. 20위권 게임 중 거의 유일한 ‘새 게임’인 <결전>은 비디오 게임쪽에선 마이너에 속하는 ‘고에이’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이 새로운 게임을 외면하는 것일까? 게이머를 욕할 수도 없다. 전반적으로 경제도 안 좋은데 나오는 게임마다 척척 살 수는 없다. 불황이면 보수적 투자를 해야 한다. 한정된 돈으로 게임을 사는 입장에서, 전에 재미있던 게임의 후속편을 사는 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대책없이 말라가는 우물에만 목매달다간 목말라 죽는다. 그리고 새로울 게 없다는 비난이 계속되면 그나마 지금은 잘 팔리는 게임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얼마 안 되는 물도 점점 더 빨리 마를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자본주의의 힘을 믿는다. 더이상 이윤을 짜낼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즉각 혁신적인 변종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시리즈물이니 울궈먹기니 하는 게 더 이상 돈이 안 되는 순간 새로운 트렌드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아름다운 구원의 여신이 될 것이라는 특이한 얘기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