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늦봄의 전주, 여름의 부천, 늦가을의 부산으로 이어진 영화 축제의 달력에, 이제 한장이 더 늘어났다. 겨울이 싸늘한 걸음을 재촉하는 가운데 광주에서도 또 하나의 국제영화제가 시작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2월7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는 12개국에서 불러모은 140여편의 영화와 함께 첫걸음을 내딛는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영화의 지평을 넓혀가는 신진 작가들과, 영화사에 또렷한 인장으로 남은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해 60여편의 장편과 80여편의 단편이 광주극장 등 시내 4개 영화관에서 8일 동안 상영된다.
이미 아시아영화의 장으로 자리를 다진 부산이나 판타지의 향연으로 개성을 갖춘 부천, 디지털영화를 비롯한 대안영화의 가능성을 찾는 전주까지 3개의 국제영화제가 있는 상황에서, 광주의 영화제 소식에 ‘또?’ 하는 의문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염정호 영화제 사무국장에 따르면, “광주가 5·18항쟁을 거치며 민주화의 고장으로 알려지는 한편, 외부에는 다소 경색된 도시로 비치는 것 같아 국제영화제란 행사를 통해 문화적 자극을 주고 그런 인식을 환기시켜보자”는 생각에서 수년 전부터 민간단체 차원에서 영화제 개최를 논의해왔다고. 지난해 시험적으로 ‘광주국제청소년영상축제’를 치른 뒤,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영화제 조직위를 꾸리면서 모은 예산은 3억원 규모. 광주시에서 5천만원, 행정자치부에서 2억원 등 알음알음으로 확보한 액수지만 다른 국제영화제보다 적은 돈이다. 예산도 적고 준비기간도 촉박한 만큼 볼거리보다는 단출하지만 내실있는 영화제를 지향하겠다는 게 조직위의 의도. “비슷비슷한 국제영화제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는 걸 안다”는 염정호 사무국장은, “다른 지자체의 영화제와 경쟁할 생각도 없고 다른 색깔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오슨 웰스 회고전 등 6회의 상영회를 열어온 서울시네마테크가 폴리티컬 시네마, 마스터스, 영 시네마 부문 등의 외주를 맡아 프로그래밍한 것도 이채롭다.
광주영화제의 프로그램은 고전적인 의미의 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 위주로 편성됐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우선 상영작 수가 가장 많은 ‘영 시네마’는 낯설지만 주목할 만한 세계의 신예감독들을 발굴함으로써 변화하는 영화미학의 흐름을 집중 조명하는 부문. 개막작이기도 한 <시간의 사용>은 포스트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간과 노동의 소외를 힘있는 리얼리즘으로 포착해내는 프랑스 감독 로랑 캉테의 베니스영화제 수상작으로, 실직 사실을 숨기는 중년의 가장과 가족들의 이야기다. 잔혹한 현실의 풍경을 지극히 절제된 영상에 담아 로베르 브레송의 미학을 계승하는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 아직도 영화실험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급격히 변화하는 중국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중국의 왕차오, 올해 한국영화의 발견이라 할 만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동시대를 탐사하는 젊은 작가들의 개성적인 시선이 ‘영 시네마’의 메뉴다. 광주의 역사적 특성을 감안해 정치영화의 걸작들을 소개하는 ‘폴리티컬 시네마’도 보기 드문 컬렉션이다. 학교로 대변되는 기성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유있는 반항을 담은 장 비고의 <품행 제로>, 전후 유럽의 모더니즘영화 흐름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작가로 꼽히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가 보여주는 역사와의 불화에 대한 전위적인 해석 <화해불가> 외에, 에이젠슈테인, 장 르누아르, 장 뤽 고다르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한 작품들이 준비돼 있다.
어느 영화제에서나 빠지지 않는 거장에 대한 오마주는, 이번 광주영화제에서도 가장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부분.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으로 화제를 뿌렸던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집으로 돌아가련다>,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되리라> 등 시간의 무게를 품어안은 거장들의 신작 위주인 ‘마스터스’, 한국영화사의 한 가운데서 작가의 길을 다져온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과 지극히 정적인 영상미로 전후 일본의 삶과 한-일 관계에 대한 통찰을 담아온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특별전이 마련된다. 특히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을 사실적이면서도 일본적인 양식미로 그려내며 일본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미조구치 겐지와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생생한 욕망의 해부도를 보여주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세계를 펼쳐보이는 ‘일본의 두 거장’까지, 영화사의 귀한 기록으로 남은 거장들의 과거와 현재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밖의 프로그램으로는 한국영화 <이것이 법이다> 등 비교적 대중적인 영화들을 모은 ‘시민영화광장’, 유일한 경쟁부문으로 418편 중에서 본선에 엄선된 한국 단편영화들의 풍성한 재기를 엿볼 수 있는 ‘광주영상대전’이 있다. 부대행사로는 임권택 감독과 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참여하는 ‘한국영화의 거장’과 ‘한일 영화교류의 신시대’ 등의 컨퍼런스와 영화음악 재즈 콘서트, DVD, 디지털영상, 게임, 만화 및 애니메이션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상영시간표 확정과 전체적인 진행이 조금씩 늦어진 관계로 입장권 판매는 온라인 예매보다 극장 매표소의 현장 판매 위주로 운영된다. 개폐막작은 8천원, 일반 상영작은 4천원이다. 첫 행사니만큼 운영상의 미숙함은 있겠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기억조차 바랜 일상을 내달려온 한해의 끝에서, 영화가 끌어안은 삶의 드넓은 풍경을 돌아보는 즐거움은 놓치기 아깝다(홈페이지 www.giff.or.kr, 영화제 사무국 062-228-9968). 황혜림 [email protected]▶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슬라이드
▶ 상영시간표
▶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영 시네마
▶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미조구치 겐지와 이마무라 쇼헤이
▶ 마스터스-영화의 세월을 품은 거장의 현재
▶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폴리티컬 시네마
▶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임권택 회고전
▶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스포트라이트; 오구리 고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