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누가 마법에 걸렸는가
2001-12-05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대중문화에 관한 한 지금은 단연 판타지의 시대이다. 판타지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어른들을 매혹하고, 문화산업을 위해서는 황금알을 낳는다. 오늘날 문자와 영상의 두 매체를 자유로이 오가며 대중을 사로잡는 판타지 장르는 공상과학 서사와 동화적 마법담이다. <스타워즈>가 공상과학쪽의 판타지를 대표한다면, 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마법담 판타지를 대표한다. 11월 추수감사절 연휴 사흘 동안 <해리 포터…>가 올린 입장료 수입은 최소 1억5천만달러 이상이라는데, 이는 <타이타닉> <스타워즈> <쥬라기공원> 같은 블록버스터들의 개봉 직후 기록들을 모두 경신한 것이다. <타이타닉>이 세운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해리 포터…>가 갈아치우게 될 것 같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해리 포터…>의 12월 상륙을 앞둔 한국에서도 한바탕 예매권 매입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판타지의 가장 화려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은 영문학이다. 20세기에 들어서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나니아 이야기>(C. S. 루이스), <반지대왕>(J. R. R. 톨킨) 등이 판타지 문학의 목록들을 풍성하게 하다가 지금은 조언 로울링의 ‘해리 포터’ 이야기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영국 판타지는 역사도 오래다. 호러스 월포울의 <오트란토 성(城)>, 앤 래드클리프의 <우돌포의 신비> 같은 18세기 고딕 소설들은 판타지 양식의 효시이다. 19세기의 영국 판타지문학을 대표하는 메어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7)은 지금도 소설로 영화로 살아 있다. 학문적으로도, 본격 문학의 반열에서 흔히 제외되던 판타지 양식이 지금은 진지한 연구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이성과 합리적 세계관의 시대가 앞문으로 쫓아냈던 어둠과 유령, 마법과 불가사의를 뒷문으로 다시 끌어들인 것이 판타지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판타지의 어떤 요소들이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판타지는 현실의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중요한 법칙들을 부정, 거부, 초월함으로써 그것들의 작동을 한순간 정지시킨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과 공간의 법칙은 사라지고 일상 규범들은 잊혀진다. 인과성의 원칙은 포기되고 개연성의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현실세계가 “콩 심은 데 콩 난다”의 법칙에 묶여 있는 동안 판타지의 세계는 “콩 심은 데 팥 난다”를 보여준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뉴턴의 논리가 정지하는 곳에서 판타지는 날개를 편다.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가설과 명제들이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적용 가능한 명제들로 바뀐다. 이 마술적 세계로 날아오르는 순간 상상력은 모든 족쇄에서 해방되고, 비밀과 신비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의 ‘엷은’ 세계는 어둠, 유령, 불가사의들이 존재하는 ‘두터운’ 세계로 이동한다.

그러나 판타지의 세계가 신명나는 매혹적 해방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마술적 해방의 외피 뒤에는 이름없고 모호하고 형체를 알기 어려운 두려움, 불안, 공포의 그림자도 깔려 있다. 마법의 세계는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그 마법의 세계로 도주해야만 즐거울 수 있는 자의 정신적 심리적 내부 풍경은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니다. 판타지는 그 자체로 두터운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원칙의 중력을 뚫고 솟아오르는 가벼운 세계이다. 판타지가 어떤 무게를 획득하는 것은 그것의 가벼움이 우리 자신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포와 욕망의 두터운 그림자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얇고 무게없는 그 비밀스런 유령의 그림자가 질량과 두터움을 얻는 곳, 감춰진 공포와 억눌린 욕망이 그 심연을 드러내는 곳, 가능성이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곳, 거기에 판타지의 비밀이 있다.

근대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을 때 그 새벽으로부터 거꾸로 중세의 저문 저녁을 향해 역진하고자 한 것이 돈키호테의 모험이고 비극이다. 그를 ‘미친 놈’이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향해 돈키호테가 던지는 질문은 궁극적으로 이런 것이다. “누가 미쳤는가? 마법에 걸린 것은 내가 아니라 세계이다.” 돈키호테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르침의 언어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의 세계는 어떤 판타지도 무색게 할 판타지가 아닐 것인가? 된통 마법에 걸린 세계 아닌가?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