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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3]
김혜리 2001-11-30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의 사랑이 고개를 드는 장소는 별이 쏟아지는 강변이나 휘황한 스카이라운지, 외딴 섬같은 ‘위대한’ 로맨스의 공간이 아닌 변두리의 버스 정류장이다. 많은 사람이 심상한 얼굴로 오가는 그곳에서, 사는 이유를 묻는 일조차 경멸하기 시작한 32살의 학원강사 재섭과 일탈과 자해를 통해 세상을 냉소하는 17살의 여고생 소희가 서로를 알아본다. 재섭은 학원에서 시선을 끌던 소희가 중년남자와 승강이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한 뒤 소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고, 집이 같은 동네인 두 사람은 어느날부터 ‘친구처럼’ 대화하기 시작한다. <반칙왕> <조용한 가족>의 프로듀서였던 이미연 감독의 데뷔작인 <버스, 정류장>의 시나리오는, 사랑을 절대적인 보물로 정해놓고 그것을 둘러싼 밀고 당김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사랑과 엇비슷한 형태로 느리게 덩어리져가는 감정의 행로를 따라가는 멜로드라마를 예고한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와 완연히 다른 영화를 만난 김태우와 아역 출연 이후 첫 번째 영화를 만난 김민정이 평범치 않은 커플을 의욕적으로 연기했다. 현재 후반작업중.

피도 눈물도 없이

‘기스 난’ 인생들에게 두려울 것이 있으랴. 어차피 세상은 혈점 튀기는 ‘투견장’일진대. <피도 눈물도 없이>는 거친 마초들이 벌이는 사투의 한복판에 수진(전도연)과 경선(이혜영), 두 여인이 도전장을 던지면서 시작하는 영화다. 한때 전설적인 금고털이범이었으나 지금은 빚독촉에 시달리는 택시 드라이버 경선. 전직 라운드 걸 출신으로 아직도 가수의 꿈을 품고 있는 수진. 헤어진 딸을 되찾기 위해, 지긋지긋한 막장을 뜨기 위해 두 여인은 의기투합, 투견장의 판돈을 가로채려는 독불이 일당을 엿먹이고 거액의 돈가방을 손에 넣고자 한다. 그러나 반전의 카운터 펀치를 품고 있는 이들이 어디 수진과 경선뿐일까. 벼랑에 내몰린 퇴물 깡패들과 한몫 챙기려는 3류 양아치들이 죽음을 담보로 한 게임에 뛰어들면서 두 여자의 멋진 반전은 뒤틀리고 꼬여간다. “두 여자가 벌이는 강탈극만 있는 게 아니라 50대 아저씨들의 올드 액션도 있고, 20대 양아치들의 소동극도 있다.” 지난해 릴레이 무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인터넷영화 <다찌마와 리>로 지각변동을 예고한 뒤, 예의 B급영화의 쾌감과 감수성으로 충무로 침공을 감행한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는 단내나는 몸싸움을 통해 폐기 직전 군상의 아비규환으로 얼룩진 카오스의 세계를 점묘한다.

이것이 법이다

시대의 테러리스트인가, 아니면 과대망상 환자인가. <이것이 법이다>는 살해과정을 인터넷에 띄우는 대담하고 지능적인 연쇄살인범 닥터Q의 행각을 뒤쫓는다. 첫 번째 희생자는 성폭행용의자로 지명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재력가의 아들. 사회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거하겠다는 연쇄살인범의 핏빛 경고는 계속되고, 이에 경찰은 완력을 소유한 강력계 봉 형사(임원희)와 영민한 후각을 지닌 특수부 표 형사(김민종)를 중심으로 특별수사반을 꾸린다. 하지만 서로 다른 수사방식으로 인해 사사건건 팀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내부에 적이 있다는 증거물까지 나오면서 갈등의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토요일 오후 2시> 이후 3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민병진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예스터데이

30년 전 그날,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예스터데이>는 2020년, 통일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납치극과 연쇄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SF스릴러다. 1년 전 한국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범인과 대치하다 아들 한별을 잃은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특수수사대 팀장 윤석은 그 살해범을 찾아다니다 5명의 노인 연쇄살인사건과 아들의 죽음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어느날 인터시티에서 경찰청장 납치사건이 일어나고, 윤석이 사건을 지휘하게 된다. 한편 아시아 경찰연합 범죄심리분석관 노희수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경찰청장의 납치현장을 목격한 뒤, 윤석과 함께 사건 해결에 뛰어든다. 그 모든 사건 뒤에는 한 남자의 30년 묵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다. <고스트 맘마> <꽃을 든 남자> 등에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굳혔던 김승우가 특수수사대 요원 윤석으로 변신, 거칠고 강도높은 액션을 선보일 예정. <예스터데이>로 데뷔하는 정윤수 감독은 20년 뒤라는 근미래를 설정한 데 대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미래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가 극에 달하리라 예상되는 시기라서 정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SF영화가 주는 미래적인 느낌보다는 ‘낯설다’는 느낌, ‘낯선 곳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내는 데 주력했다”고.

쉘로우 할

메리뿐 아니라 로즈메리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보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 시대극과 궁합이 잘 맞는 귀족적인 마스크의 배우 기네스 팰트로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패럴리 형제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쉘로우 할>의 웃음지수는 만만치 않게 높아진다. 게다가 기네스 팰트로가 맡은 역할은 130kg이라는 몸무게 덕분에 의자 다리도 부러뜨리는 여자 로즈메리. 할은 예쁘고 날씬하고 근사한 몸매의 여자들하고만 데이트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지켜온 남자다. 어느날 ‘특별한 몸무게’를 가진 여자 로즈메리가 나타나면서 할이 그동안 잘 지켜왔던 철칙에 문제가 생긴다. 로즈메리는 전직 평화봉사단원이자 현재는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 로즈메리에게 반한 할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날씬하고 아름다워보인다. <쉘로우 할>은 박장대소와 엽기적인 유머 사이사이로 ‘제눈에 안경’이라는 교훈을 그로테스크하게 설파하는, 전복된 ‘미운 오리 새끼’ 우화다.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등 악명높은 화장실 유머의 대가 패럴리 형제가 이번엔 어떤 엽기적인 웃음을 선사할까? 뚱녀가 된 기네스 팰트로의 변신도 기대할 만하다.

밴디츠

<내일을 향해 쏴라>의 재림이라 불러도 될 듯한 영화. <밴디츠>는 ‘21세기형 부치와 선댄스’인 조와 테리라는 두 은행털이범이 인질극을 벌이다 실패하고 최후를 맞는 순간을 TV쇼를 통해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플래시백. 조와 테리는 실패를 모르는 은행강도다. 카리스마가 있고 여자를 좋아하는 조와 까다로운 우울증 환자인 테리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은행을 털기로 한다. 은행을 털기 전날 밤 지점장을 납치했다가 다음날 영업시간 전에 지점장과 함께 들어가 은행을 터는 대담한 수법으로 둘은 명성을 떨치게 된다. 한편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던 케이트는 일상탈출을 꿈꾼다. 인질과 인질범으로 시작한 한 여자와 두 남자. 케이트는 처음엔 조에게 끌리지만 손튼과 밤을 보내고, 세 사람의 혼란스럽고 로맨틱한 여정이 시작된다. <왝 더 독> 등 신랄한 정치풍자코미디를 만들기도 했던 배리 레빈슨 감독은 <밴디츠>에도 코믹한 요소를 점점이 뿌려놓는다. 액션에서 드라마로, 이젠 코미디로 영역을 넓혀간 브루스 윌리스가 성마른 조를, <아마겟돈> <에어 콘트롤>의 연기파 배우 빌리 밥 손튼이 우울증 환자인 테리를, <엘리자베스>의 케이트 블랑슈가 케이트를 맡아 사랑과 웃음의 삼중주를 들려준다.

에너미 라인스

21세기 스타일의 전쟁영화를 보여주마. <에너미 라인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 등 사실적인 영상의 계보를 잇는 전쟁영화를 표방한다. 제작자 존 데이비스는 액션과 화려한 불꽃놀이 같은 폭격신만으로 스크린을 도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21세기에 걸맞은 전쟁영화를 만들어내자는 창대한 목표를 세웠다. 스펙터클한 액션은 기본이고, 그림 같은 특수효과에 정치학과 대중의 마음까지 풍성하게 담아내자는. 덕분에 <에너미 라인스>에는 다른 어떤 전쟁영화 못지않게 액션이 풍성하고 최첨단 군사장비가 동원되는가 하면, 복잡한 상황에 처한 개인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잡아내려 한다. 보스니아 내전지역을 정찰하던 젊은 파일럿 크리스에게 갑자기 미사일 세례가 퍼부어진다. 순식간에 적지 한복판으로 떨어진 크리스의 임무는 이제 적지를 탈출하는 것. 하지만 단순한 정찰기에 미사일을 발포하는 건 상식 밖의 과잉공격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감추어야 했던 적의 비밀은 무엇일까. 크리스를 구하기 위해 급파된 미군 최정예 특수부대와 보스니아 반군 사이에서는 일대 접전이 벌어진다. 신인감독 존 무어가 스펙터클한 액션과 인간의 복잡한 심리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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