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고 애니메이션만 기억하면 어쩌지"
‘다르르르르르….’ 프라모델 비행기 한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어수선한 오후의 소음 속을 부유하던 비행기가 우리를 인도하는 골목은 낯익은 듯 새로운 세계다. 수채화 붓을 통해 불러낸 유년의 공간. 트램펄린을 반동삼아 구름을 잡을 듯 뛰는 아이들, 담배를 문 입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구경하는 중년아저씨, 번개가면을 서로 뺏으려 자전거 위에서 장난치는 동네 녀석들. 그 한가로운 골목풍경 속으로 쭈뼛쭈뼛 걸어들어오던 노란모자 소년. 악동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골목으로 돌아가던 소년은 결국 그들의 눈에 띄어 모자를 뺏긴다. 하늘로 휙, 날아가는 노란 모자. 모자는 대문 넘어 뻗어나온 어느 집 나무 위에 걸리고, 키가 닿지 않는 소년은 한아름 짱돌을 던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때 소년 곁을 배회하던 강아지의 코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이들의 발걸음은 잠시 나무 아래 계단에 머문다.
날렵하게 달려가는 셀 애니메이션의 매끄러운 질감도, 머리카락의 올 수와 방향까지 계산된 3D 애니메이션의 또렷한 입체감도 아니다. 스케치북 위로 번져나간 붓질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수채화 같이 풋풋한 애니메이션. 순정영화를 표방한 <와니와 준하>의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포진된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비갠 뒤 하늘 같은 느낌이다. 캐릭터의 과장이나 강조 대신 로토스코핑(lotoscoping)이라는,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된 사실적 터치가 전하는 6분3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은 총 114분짜리 영화 <와니와 준하> 전체를 더없이 풍성한 결로 채색한다.
캐스팅 바뀔 때마다 다시 출발점으로
“지난해 봄, 우박이 내리던 날이었어요.” 애니메이션을 담당한 이종혁 감독이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을 만난 지도 벌써 1년 반이 훌쩍 넘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느낌은 기존 상업영화와 다르다는 거였고, 그렇다면 애니메이션도 기존 상업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새로운 아트워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채화가 딱이더라구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일찌감치 애니메이션이라는 세계에 정착했다는 이종혁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애니메이션작업이나 오돌또기의 일원으로 TV물이었던 박재동의 <시사만화>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일하기도 했고, <은행나무 침대>의 포스터비주얼을 그려낸 만만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구체적으로 발표한 개인단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지라 처음부터 쉽게 그러마, 하고 응하지 못했다. “이 정도 이야기면 셀 애니메이션도 괜찮겠다며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려고도 했는데 김 감독이 내가 보여준 몇몇 수채화톤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이런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는 정서적, 미술적 합일점을 찾아나갔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을 찾아가기까지 지난 1년 반은 결코 쉽게 흘러가진 않았다. 아예 전체 애니메이션이라면 모를까 실사영화에 양념처럼 들어가는 애니메이션은 자칫 촌스러워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실사배우와의 접점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캐스팅이 바뀐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들도 함께 뒤집어졌다.
‘얼굴 라이브러리’로 표정변화를 잡다
“초등학교 교과서 그림처럼 될까봐 제일 걱정이었죠.” 어린 준하와 와니의 얼굴은 순박하면서 담백한 얼굴이어야 했지만 큰 눈, 큰 코, 큰 귀 등 얼굴의 특정부분만 과장해서 표현하는 기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익숙한 작업형태로는 세심한 표정의 변화를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신체 어떤 부위보다 얼굴은 50% 이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에요.” 실사촬영을 통해 사람의 얼굴에 가깝게 그려진 와니와 준하의 그림체는 눈을 그리는 연필선 한 두께만큼의 차이에도 감정의 변화가 생길 만큼 세밀한 것이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어린 와니와 준하 얼굴을 지점토로 빚어 디지털카메라로 상하 각도별 촬영을 한 뒤에 그것을 데이터화해서 ‘얼굴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몸은 움직임에 의해 표현할 수 있지만 얼굴은 콘트라스트에서 많은 표정이 생기거든요.” 그렇게 아이들의 통통한 볼과 콧망울, 입술은 등고선을 따라 새로운 표정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어린 와니가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또로록 떨어뜨릴 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거나, 넘어진 준하의 쑥스러운 듯한 눈과 입술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하지만 초반엔 실사배우들의 화려한 얼굴에 비해 애니메이션 속 아이들 얼굴이 너무 밋밋한 게 아니냐는 말도 많았다. “애니메이션 세계에서는 주인공을 주변인물보다 상대적으로 예쁘게 그리면 미남, 미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설득시켜나갔죠.”(웃음)
로토스코핑 작업을 통한 애니메이션만들기는 웬만한 단편영화 하나를 찍는 것과 별반 다름없었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촬영용 콘티를 그린 뒤에 촬영장소를 헌팅하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조명과 동시녹음 촬영팀이 모두 동원된 촬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실사로 촬영된 영상은 각 프레임을 프린트해서 원화작업에 들어가고 부족한 동작의 디테일은 동화부에서 채워넣게 된다. 얼핏 반복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라도 사이클을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고 매번 조금씩 다르게 새로 그려넣었다. 이후 일일이 손으로 채색해야 하는 페인팅 작업은 이종혁 감독이 출강하고 있는 한겨레문화센터 학생들 중 서양화과 졸업생들의 도움이 컸다. “<와니와 준하>는 놀라운 입시미술의 힘을 보여준 거라니까요.” (웃음) 그의 농담이자 진담인 말이 무색하지 않으리만큼 <와니와 준하>의 색감은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냈다. 또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잇기 위해선 3D에서 자주 사용되는 몰핑(Morphing)기법을 사용했다. “수채화는 개개의 터치가 주는 느낌과 의미가 있는데 여러 장이 겹치다보면 흐르는 게 아니라 시끄럽게 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욕심 덕인지 초반 4분 정도 계획했던 애니메이션 분량은 6분이 넘게 늘어나고 있었다.
때로는 실사처럼, 또는 판타지처럼
어린 준하가 악동들을 피해 삥 돌아간 골목의 계단. 터벅터벅 혼자 걷던 소년은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지그재그 ‘갈지자’를 그리며 내려가는 혼자만의 장난에 빠진다. “예전부터 계단이란 공간에 대한 애정이 있었어요.” 골목으로, 다락방으로, 지붕으로 이어주는 계단의 매력을 외로운 아이의 심리와 함께 담아내기 위해 애니메이션용 실사촬영 때는 아역연기자에게 발을 내디뎌야 하는 지점에 테이프를 붙여주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로토스코핑은 하면 할수록 매력을 느끼게 돼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일상적 움직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걸 느끼게 해주거든요.” 어린 와니가 카메라가 돌면서 성인 와니로 변하고 멀리서 준하가, 데자부를 일으켰던, 그 ‘마법의 수인사’를 보내는 에필로그는 좀더 실사에 가깝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진모씨는 보는 각도에 따라 정말 다른 느낌이 나는 얼굴이거든요.” 특징만 잡아서 그렸다가는 ‘실물과 다른데…’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라 그 부분은 촬영된 화면을 거의 벗어나지 말고 작업해야 했다. “하지만 실사가 아닌 이상 결국 애니메이션은 판타지예요. 너무 정확하게 매칭되는 영상이나 사운드 같은 경우엔 정감이 없거든요.”
“위약금 물어주고 그만둔다고 할까?”
“매일매일 마라톤을 뛰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결국 1년 반의 긴 마라톤을 완주한 이종혁 감독은 영화 속에 나오는 영민의 대사처럼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닌 것 같다”며 소진한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 작업이란 게 과정마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지만 결국 매컷의 마무리는 혼자 해나가야했어요.” 기자시사 전날까지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초초했던 마음을 기억하며 “많이 외로웠죠. 개봉을 못하는 게 아닐까? 위약금 물어주고 그만둔다고 할까? 울기도 많이 울었다니까요” 하는 엄살도 잠깐, “영화본 사람들이 애니메이션만 기억하면 어떡하지?” 하는 ‘자뻑’의 귀여운 고민을 풀어놓는 감독의 표정은 한눈에도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기억저층에 침화되어 이미 색과 향이 날아가버린 어린 시절의 풍경뿐 아니라 정서까지 온전히 우리 앞에 불러낸 마법의 붓질. 과장하지 않고 사실적이되 상상력의 미덕을 간과하지 않는 영상은, 결코 실사와 애니메이션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와니와 준하>의 애니메이션은 뜯고나면 버려지는 화려한 포장지가 아니라 살과 단단하게 밀착된 아름다운 무늬의 가죽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글 백은하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