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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살며, 찍으며, 배워나가네
변영주(영화감독) 2009-05-28

대추리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 던지는 <길>의 미덕

“할아버지는 항상 논에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햇빛이 쨍쨍한 날에도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에도….” 김준호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영화 <>은 이렇게 담담한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막 뒤의 첫 장면에는 논에서 뽑아야 할 피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감독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감독은 흡사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친할아버지의 일손을 도우러 온 손자처럼 벼처럼 보이는 피와 빨간색의 피가 있다는 말을 영어단어 외우듯 반복해 할아버지에게 확인한다. 그리고 비록 우리는 화면에 보이진 않지만 한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이제는 어른이 된 손자가 대견한 듯 끊임없이 소주를 건네는 할아버지가 주신 소주병이 있고, 그리고 아마도 더위만큼이나 술기운에 벌게져서 스스로 농사일을 배우러 온 것인지, 혹은 낮술을 배우러 온 것인지, 사실은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감독의- 에잇, 몰라 몰라. 그냥 살다보면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알게 되겠지-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대추리에서 살고 낮술을 배우며…

2004년 국익을 위해 이곳에서 나가달라는 엽서 한장을 받고 난 뒤, 몇대에 걸쳐 거친 땅을 갈아 논을 만들어 생활하던 평택 대추리의 농민들은 2004년 9월부터 2007년 3월까지 촛불문화제를 개최하며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고 그냥 살던 대로 농사짓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말하면 폭압적으로 경찰을 몰고와서 논의 물길을 막고 장비를 동원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들고, 주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낸(지금도 서울과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자행되는) 이 몰염치하고 비인간적인 철거와 내몰기는 대추리의 농민들에겐 솔직히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부모는 이미 일제시대 때 비슷한 일을 겪었고, 한국전쟁 때도 미군기지로 인해 기름진 땅 다 내주고 바로 이곳으로 와서 소금냄새 가시지 않은 거친 땅을 갈아엎어 농지로 만들어왔을 뿐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의 일방적이고 더럽게 준비 안된 한-미 FTA 협상 개시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던 그때, 대추리는 노무현 정부에 관한 어떤 상징이었다.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 정도로 언행이 불일치하던 참여정부 시기, 기륭전자를 비롯한 많은 생산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해 거리로 나와 인간의 삶을 이야기했고 대추리의 촛불문화제는 바로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몇몇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대추리로 발길을 옮겼다. 푸른영상의 김준호 감독도 그중 한명이었고, 그곳에서 이 사려 깊은 신인감독은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라는 사건 너머의 어떤 지점을 보고 싶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린다.

영화 <>의 모든 장점은 아마도 김준호 감독의 대추리를 대하는 첫 태도에서 시작된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경우, 특히 소재가 강하고 당대적이며 이슈가 명백하고 사건이 현재진행형일 경우, 감독은 때때로 사건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말 때가 있다. 이를테면 숲은 열심히 보는데 그 숲이 어떤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 면에서 김준호 감독은 푸른영상의 선배들이 어떻게 작업해왔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살아보는 것. 김동원 감독이 상계동에서 시작되어 어느덧 스스로 봉천동의 달동네 아저씨가 되어 그 마음으로 영화를 찍는 것처럼 김준호 감독은 투쟁의 현장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대신 투쟁을 하는 농민들의 심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곧 한명의 할아버지를 만난다. 방효태 할아버지. 온몸이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의 할아버지를 통해 김준호 감독은 농사일을 배우고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낮술을 배운다.

농사에서 시작해 영화로 전진

그리고 영화 <>을 보는 우리 관객은 대추리와 관련된 영화라는 정보를 통해 잔뜩 무장하고 있던 전투적인 심장을 일순 놓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는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이야기보다 피를 뽑는 방법과 다양한 벼농사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농행위를 하는 자에겐 2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을 물게 한다는 특별조치에도 할아버지의 걱정은 쫓겨난 뒤 어떻게 살아갈지가 아니라 물을 대지 못해 말라죽는, 그래서 스스로 농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것뿐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은 대추리 투쟁에 관한 본원적인 질문, 즉 이 농민들은 왜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결국 그것은 배상의 문제도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다. 농부에게 땅을 뺏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살지 말라는 이야기와 다름없다는 것. 그 대답을 방효태 할아버지는 노동을 통해 이야기한다.

대추리의 촛불문화제가 끝나던 날. 바꿔 말하면 대추리의 투쟁이 어찌되었건 패배하고야 만 그날, 방효태 할아버지는 안타까움과 서러움에 술을 마시는 활동가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이야기한다. 노동을 통해, 삶을 통해, 그리고 자연을 통해 어느덧 세상의 지혜를 알아버린 할아버지는 희망과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이 할아버지가 세상에 주는 지혜를 소중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바로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그 소중한 희망의 이야기는 영화 <>이 대추리 투쟁에 관한 영화일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세상에서 두발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어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보석 같은 선물이 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준호 감독은 할아버지를 통해 농사를 배웠고, 낮술을 배웠고, 삶의 지혜를 배웠으며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법까지 배우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

그런 면에서 영화 <>을 본다는 것은 결국 배움의 과정에 동참해서 내 마음속에 희망을 싹트게 하는 것 같다. 요즘처럼 미친 바람만 부는 것 같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숨쉬는 것도 힘든 때,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은 큰 울림을 준다.

“우리가 실패해도 너무 허무해하지 마. 사람들에겐 길이라는 것이 있어. 살면서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가 있잖아. 그것은 바로 정의야.”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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