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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2001-11-26

60년대 판타지영화 6편 상영, 15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60년대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영화제가 지난 8월 ‘7인의 감독전’에 이어 11월25일부터 ‘과거로의 환상여행’을 시작한다. <살인마>(이용민), <하녀>(김기영),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 <꿈>(신상옥), <마의 계단>(이만희),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등 60년대 영화 6편에 배창호 감독의 <꿈>을 덧붙여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는 한국영화 전성기에 만들어진 판타스틱한 장르영화들을 엿볼 드문 기회이다. 당시 이런 유의 영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된 방식은 최근 영화학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는 <근대성의 유령들>에서 이런 영화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 근대성이 대낮을 밝히는 와중에, 근대화 정책이 ‘현실’에서 혹독하게 말살해버린 여귀, 야수, 괴물, 영매, 무당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밝혔다. 일반적인 판타지 장르로서 이 시대의 공포영화는 전근대와 근대라는 짝짓기를 적극 가동하며 생겨났다.”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들을 눈여겨본다면 실제 이 시기 판타지 장르가 역사와 시간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아트선재센터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영화제는 아트선재센터와 부천시 소사구청 소향관에서 진행된다. 영화제가 시작되는 11월25일 오후 4시 아트선재센터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김홍준씨가 나와 ‘옛날 판타지영화를 보러 갔다’는 제목으로 특별강의도 할 예정. 편집자

<마의 계단>

1964년, 감독 이만희 출연 김진규

1960년대 한국영화를 논하면서 이만희 감독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난센스일 거다. 멜로와 전쟁영화,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이만희 감독은 종횡무진하면서 다채로운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마의 계단>은 1964년작으로 미스터리스릴러. 버림받은 여인의 한풀이라는 토속적인 소재를 취하면서 이만희 감독은 ‘영상파’로서 화면을 빚어낸다. 이만희 감독이 평이한 장르물 틀 안에서 영화라는 시각매체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했다는 점은 지금 돌이켜봐도 놀랍다. <마의 계단>은 출세 때문에 여성을 버리는 남자 이야기다. 병원에 근무하는 현 과장은 원장 딸과 약혼하기로 내정돼 있다. 그런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 진숙이라는 간호사와 현 과장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현 과장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진숙을 무심결에 계단에서 밀어 추락시킨다. 병원에 입원한 진숙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그는 아예 살해할 결심을 한다.

<마의 계단>은 이만희 감독이 장르영화의 거장 경지에 올라 있음을 실감케 한다. 멜로와 스릴러, 미스터리 등의 장르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마의 계단>은 구조상 나무랄 데 없는 완성도를 갖춘다. 영화에서 병원이라는 근대적 공간은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 찬 곳으로 묘사되며 여인을 버린 남성은 거의 실성 직전 단계까지 간다. 스릴러영화이면서 <마의 계단>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 <마의 계단>에선 특히 계단이 상징적인 장치로 쓰인다. 현 과장은 실수로 진숙을 병원 계단에서 추락시키고, 입원한 그녀에게 약을 주사한 뒤 비상구 계단을 통해 운반한다. 출세라는 상승의 의미와 한 여성의 몰락이라는 하강의 의미, 두 역설이 공존하는 거다. <마의 계단>엔 해외 거장인 히치콕이나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스릴러영화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시체가 실종된 뒤 살인자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과 동일한 모티브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은 빼어난 장르영화인 동시에 고전적 품격을 지니는 작업이다. 이처럼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스릴러물을 1960년대에 만들어냈다는 건, 좀처럼 믿기 힘들다.

<하녀>

1960년, 감독 김기영 출연 김진규

마성의 미학을 과시한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이다. 얼핏 보기에 인물 심리를 전면에 내세운 것 같지만 <하녀>는 당시의 사회적인 맥락을 깔고 있다. 실제로 1960년대엔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젊은 여성들이 가정집에서 가사일을 돌보며 생활을 꾸리는 일이 잦았다. 생전의 김기영 감독은 “당시에는 가정부가 있는 중산층 집안에서 치정사건도 곧잘 일어나곤 했고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주로 중산층 가정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하녀>를 만들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여공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동식 집에 가정부가 들어온다. 동식은 수입이 별로 많지 않은 편이고 아내가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형편이다. 젊은 가정부는 집안일을 무리없이 해나간다. 그런데 아내가 친정에 가고 집을 비우자 남편은 순간의 실수로 가정부를 범하게 된다. 동식이 아내에게 가정부의 임신 소식을 전하자 아내는 강제로 낙태를 시키고, 하녀는 복수를 시작한다.

<하녀>는 김기영 영화세계의 원형처럼 보인다. 감독은 이후 하나의 시리즈처럼 이 영화의 스타일을 엇비슷하게 되풀이하면서 <화녀>와 <충녀> 등을 만들었다. 주로 남성적인 판타지를 스크린에 펼쳐보이곤 했던 김기영 감독은 <하녀>에서도 어느 가장이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런데 결과가 예상 밖이다. 집안의 살림을 맡고 식모살이를 하는 여성이 낙태의 경험을 거치면서 차츰 집안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게 되며 가정을 송두리째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소영씨는 <하녀>에 대해 “1960년대의 억압계층인 식모는 중산층 가정을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영화 속 계단은 중산층 가족과 하녀의 전쟁터로 변하고 영화는 공업화와 도시화에 기인한 사회적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영화엔 근대화의 미명하에 희생당하고 자신의 육체까지 희롱당하는 여성의 복수극, 계층간의 모순 등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중산층의 어느 이층집에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갈등과 복수의 드라마를 김기영 감독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기괴한 에너지가 잠복한 미장센으로 담아낸다. 스릴러영화의 계보를 논하는 데 <하녀>는 빠져선 안 될 작품이며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도 중요한 작업에 속하는 걸작이다.

<꿈>

1967년, 감독 신상옥 출연 신영균

이광수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신상옥 감독이 1955년에 제작한 최은희 주연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 <꿈>은 신상옥 감독의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세속적인 욕구와 불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어느 승려의 이야기다. 특이한 건 <꿈>이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던 여느 사극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거다. 화려한 미장센, 눈이 부실 정도로 원색 계열이 강조되는 의상은 신상옥 감독이 비슷한 시기에 만든 사극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승려 조신은 달례라는 여인을 만난 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더이상 참선도 하지 않고 그는 달례의 미모만을 머릿속에서 되뇌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노스님에게 자신의 고민을 설명한 조신은 우연히 달례의 목욕장면을 본 뒤 함께 도주한다. 둘은 가정을 꾸리고 힘들게 살아가지만 나름대로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조신과 달례를 는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상은 순식간에 붕괴하기에 이른다.

<꿈>은 현실과 환상, 그리고 다시 현실이라는 회귀적인 구성을 취한다. 원작과 상통하는 대목이지만 신상옥 감독은 영화에서 현실이 환상으로 바뀌는 순간, 그리고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지점을 분명하게 표시해둔다. 꿈과 욕망이 교차하고 이것이 다시 지상으로 하강하는 순간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구조를 세심하게 다듬은 흔적이다. 캐릭터에 관한 고민도 드러난다. 1955년작인 <꿈>이 달례라는 여성의 시점이 두드러졌다면 1967년작은 신영균이 연기하는 조신의 시점이 강조된다. 오히려 달례는 조신을 승려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살인을 교사하는 등 악녀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신상옥 감독이 <꿈>을 대부분 산중에서 촬영했다는 것. 산중에서 처음 달례를 만난 조신은 산사에서 험난한 계곡들로 이동하고, 달례와 살림을 꾸민 뒤 정착한다. 그리고 환상에서 깨어나 산사로 되돌아온다. <꿈>은 이렇듯 자연이라는 원형적 공간에 속한 인물 군상을 중심에 두면서 자연이라는 대상에 인물 심리를 곧바로 투영시킨다. 조신이 여성을 보고 번뇌를 느낄 때, 계곡 시냇물이 어지럽게 흐르는 것을 비춰보이는 식이다. 신상옥 감독은 <꿈>에서 종교와 설화적인 판타지를 경유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미의식의 모델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꿈>

1990년, 감독 배창호 출연 안성기

신상옥 감독의 <꿈>이 고전 성격이 강하다면, 배창호 감독의 <꿈>은 현대판 버전이다. 여기서 조신은 상대 여성의 목욕탕에 뛰어들어 상대를 겁탈하고 달례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남정네의 뺨을 갈긴다. 배창호 감독은 <꿈>에서 두명의 불행한 연인에게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캐릭터 변화를 허락한다. 어느 캐릭터도 상대를 억압하거나 주도권을 쥐지 않고, 원작과는 다른 성격으로 탈바꿈해서 극을 이끈다. 신상옥 감독의 <꿈>과 비교해보면 이는 작품의 질을 완전히 뒤바꾸려는 모험이다. 1990년작 <꿈>에서 조신과 달례는 가정을 꾸리고 염색집을 경영한다. 하지만 조신은 달례의 마음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달례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 조신을 괴롭히고 결국 몸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한다. 조신은 “넌 계획적으로 나를 유혹하려고 했던 거다”라며 달례를 나무라고 암담한 현실을 견디다 못해 약물에 의존하는 신세가 된다.

배창호 감독은 이미 <황진이>(1986)에서 현대에서 과거로의 이행을 시도한 바 있다. <꿈>은 원작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되 부분적인 변색을 꾀한다. 조신이라는 캐릭터는 좀더 관조적인 인물로 변했고, 달례는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현대 여성상에 가깝다. 배창호 감독은 스토리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하는데 계절이 바뀌는 풍경, 고즈넉하고 정적인 이미지가 약간 헐거운 서사를 보충한다. <꿈>에선 동화 같은 모티브도 눈에 띈다. 여성캐릭터가 거울에 유난히 몰두하는 것, 어린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듯한 꿈결 같은 밤풍경, 그리고 여성들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영화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 배창호 감독의 <꿈>은 처절하다. 유곽에서 몸을 파는 여성의 비참한 종말에 관한 언급은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를 연상케 하면서 비극으로 정면돌진한다. 하지만 배창호 감독은 여성의 쓸쓸한 드라마 대신, 멜로의 정서를 끝까지 고이 간직한다. 달례를 잃은 조신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달례의 약혼자였던 모례 역시 칼로 조신의 목을 내리치는 대신 자비를 선물한다. 아마도 배창호 감독은 영화에서 종교에 관한 심오한 명상보다 ‘인간’을 향한 애정관을 선뜻 택했던 것 같다. ▶ 60년대 판타지영화 6편 상영, 15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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