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5천원 내고 자고, 배우고, 사귀고
2001-11-23

부산영화제 찾은 영화광의 새둥지, 함지골 24시

올해 부산영화제엔 특별한 장소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함지골. 정확한 명칭은 함지골청소년수련원이다.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산 기슭에 자리한 이 수련원을 영화제에서 빌려, 하루 숙박료 5천원에 일반관객에게 잠자리로 제공했다. 가난한 영화광들이 한푼이라도 아껴 영화표 살 돈을 보탤 수 있게 해주는, 덤으로 영화마니아 친구들과의 파자마 파티까지 제공하는 이 공동숙소의 하룻밤을 전한다.

뒤로는 봉래산, 앞으로는 영도 해변산책로가 바다를 따라 이어져 있는 풍광이 특급호텔 수준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30인, 20인, 혹은 45인 1실 구조. 다닥다닥 이층침대들이 붙어 있는 일종의 ‘도미토리’ 시스템으로 세면장과 샤워실은 공동사용한다. 규율도 엄격해서 11시 ‘귀가’ 통금을 지켜야 하는 곳. 그뿐 아니다. 음주 금지, 흡연 금지, 음식물 반입 금지.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마니아들과 단체방문객이 경비절감을 목적으로, 혹은 독특한 추억을 기대하며 이곳을 찾았다. 외국인 숙박객들이 뒤섞여 있는데, 특히 서울프랑스학교의 학생 팀 21명이 단체입주를 하면서 함지골은 모름지기 ‘국제’ 숙박소가 되었고, 유럽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함지골의 하루는 밤 10시경부터 시작한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남포동 극장가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입주객들이 잠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하는 시간. 복도는 세면도구를 들고 샤워실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방은 방대로 소란 그 자체다. 함께 온 친구, 여기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 각자 침대에 걸터 앉아 하루 일들을 이야기하기 바쁘다. 한국인 숙박객이 몰래 들여온 치킨을 맛나게 먹고 있는 야외공간 한켠에선 어린 프랑스 친구들이 야구공을 가지고 공놀이에 한창.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영화제를 찾은 알짜배기 영화광들은 씻을 생각도 안 하는 듯 복도에 모여 본 영화, 볼 영화의 정보를 교환한다.

서울프랑스학교에서 온 21명(인솔교사 3명, 학생 18명) 팀은 일종의 영화특성화클래스. 단체로 영화관람을 하고 아침마다 PC방에서 전날 본 영화감상문을 학교사이트에 올리고, 6mm 카메라와 아이북을 가져와 영화제 동안 촬영 및 편집훈련도 하는, ‘부산영화제 집중교육코스’를 밟았다. 처음 프랑스 학생들이 “옷도 훌러덩훌러덩 갈아입고 춤추고 놀고 그러는 모습에 어찌할 줄 몰랐”던 것도 잠시, ‘내국인’ 숙박객들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인터넷 동호회 멤버들, 서울극장 부산영화제 매표소 앞에서 만나 함께 부산에 온 친구, “싼 맛에” 함지골에 짐을 풀었다는 여대생들, 휴가내고 영화 보러 온 직장인들 등 함지골의 침대를 차지한 이들은 면면도 다양. 이중 가장 ‘어렵사리’ 함지골에 입주한 이는 게임회사에 다니는 박성호씨로, 영화가 늦게 끝나 첫날은 노숙, 둘쨋날은 ‘HBO’ 부스에 있는 선배 숙소 신세를 진 뒤, 셋쨋날에야 영도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단다.

하루 내내 영화보랴 끼니 챙기랴 바빴을 텐데, 왜 이리도 들어오자마자 급히 움직이는 걸까. 그건 함지골의 또 하나의 원칙 때문이다. 바로 12시 소등. 밤 12시, 전체 숙소에 불이 꺼지면 함지골은 짧은 ‘러시아워’를 마치고 ‘공식적’으로는 조용해진다. 그러나 지각생들의 띄엄띄엄 ‘심야귀가’가 끝나고, 자원봉사자들이 하루 일 정리까지 마치고 나면 대략 1시. 함지골 ‘주민’들은 그때서야 모두 잠자리에 든다. 남포동 여관에는 아직도 불켜진 창들이 많을 시간이다.

그리고 다시 아침 9시만 되면 함지골의 방에는 짐들만 남는다. 사람들은 모두 남포동 인파 속으로 합류. 누구는 극장 매표소 앞에서, 누구는 식당의 아침상 앞에서, 누구는 PC방에서 또 하루의 부산을 여는 이들은 이미 수많은 부산영화제 관객 중 일부이다. 그러나 조금 각별하게, 이들 함지골 주민들에게 ‘부산’은, 남포동 거리만이 아니라 함지골의 떠들썩한 밤과 청명한 아침바다가 묻어나는 독특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글 최수임 [email protected]

사진 손홍주 [email protected]▶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9일간의 결산

▶ 올해의 수상작

▶ PPP 결산

▶ 남포동에서 건진 진담, 농담, 잡담

▶ 부산영화제 찾은 영화광의 새둥지, 함지골 2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