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영화는, 걸작은 아니며 각자의 결함이 있긴 해도, 한결같이 개성과 재능이 넘치는 신인감독들의 작품이다.” 최우수 아시아 신인작가상(New Currents Award) 심사위원이었던 영화평론가 피터 반 뷰렌의 이야기는 올해 부산영화제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화두는 다름아닌 한국영화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한해 동안 아시아영화의 경향을 한눈에 보여준다는 이 영화제의 성격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놀라운 발전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영화의 대약진이야말로 올해 아시아영화의 흐름 중 가장 두드러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결 부문에서 <꽃섬> 등 한국영화가 상을 ‘싹쓸이’한 것도 결국 이같은 관심의 결과물이었다.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1월17일 타이영화 <수리요타이> 상영을 마지막으로 9일 동안의 벅찬 일정을 마쳤다. “이제 부산영화제는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에서 세계적 영화제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폴 디 카발로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부산영화제가 그 여섯 번째 무대를 통해 ‘세계 최고의 아시아영화 축제’라는 독보적 위치를 굳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관계자들의 평가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김동호 위원장은 “칸, 베를린, 로테르담영화제를 포함한 40여명의 해외영화제 관계자들이 부산을 찾아와 자신의 영화제에 출품할 아시아영화들을 골랐다는 점만으로 봐도 부산영화제의 위상이 한 단계 올랐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역대 행사 중 가장 많은 국가인 60개국에서 200편의 장·단편이 상영된 이번 영화제에서는 전체 18만3천 좌석 중 13만 좌석 가까이 팔려나가 매표율은 약 72%를 기록했다. 지난해 76.3%에 비하면 약간 떨어진 수치. 11월치고는 기온은 따뜻한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예년보다 1달 늦게 열렸다는 점이 관객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영화제쪽은 분석한다. 완전 매진되거나 1회 매진된 110편의 작품들은 거장의 신작부터 아시아 신인감독의 작품, 한국영화,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됐다. 또 이번 영화제를 찾은 게스트는 30개국의 총 3761명이었다. 이중 해외에서 찾은 게스트는 659명이었고, 언론인은 72명이었다. 12∼14일 열린 PPP행사도 850명의 게스트가 참여, 300여건의 미팅을 성사시키며 아시아 최대의 프리마켓이라는 위상을 확실하게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대약진이었다. 이같은 분위기는 아시아의 신인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물결 부문의 수상결과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꽃섬>의 송일곤 감독은 주요 경쟁부문인 최우수 아시아신인작가상과 국제영화평론가협회(FIPRESCI)상, 관객의 투표로 결정되는 PSB영화상 등 세 부문을 수상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은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을 수상했고, 최우수 아시아신인작가상에서는 특별 언급됐다. 또 심사위원단이 올해에 한해 2편 이하의 작품을 만든 한국감독에게도 상을 주기로 협의한 데 따라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은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공동수상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과 <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은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에서 특별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샴·하드로맨스>를 만든 지하창작집단 파적의 김정구 감독은 한국단편영화 중 최우수 작품을 만든 감독에 수여하는 선재펀드를, <작별>의 황윤 감독은 한국다큐멘터리상인 운파펀드를 받았다. 애초부터 한국영화 감독에게 주도록 규정돼 있는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선재펀드, 운파펀드를 제외하고도 한국영화가 모든 부문을 휩쓴 데 대해 한 심사위원은 “아무리 고르려고 해도 한국영화 외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 또다른 심사위원은 “부산영화제가 한국영화에 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질 낮은 아시아영화를 프로그래밍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사실 새로운 물결 부문의 수상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나타난 한국영화 붐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영화제 기간 내내 한국영화들은 좌석점유율면에서나 비평면에서나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의 좌석은 매진됐고, 이중 상당수는 외국의 영화제 관계자와 평론가, 기자들의 몫이었다. 해외 영화배급업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더스트리 스크리닝도 평균 30∼40석이 채워졌다. <나쁜 남자>의 인더스트리 스크리닝에는 150명의 해외 게스트가 몰렸을 정도. 특히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 송일곤 감독의 <꽃섬> 등을 본 뒤 즉석에서 감독, 제작사와 영화제 출품을 논의하기도 했다. 특히 베를린영화제는 내년 행사에 한국영화를 30편 정도 초청할 것이라는 의사를 김동호 위원장에게 전하기도 했다. 외국의 기자들도 한국영화에 높은 점수를 줬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에디터 패트릭 프래터는 “한국영화 4∼5편을 봤는데, 각각의 작품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영화 약진, 대약진
영화제 시작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신상옥 감독 회고전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지옥화> <다정불심> 등의 작품이 한때 매진됐고, 대부분 작품이 많은 관객이 들어찬 가운데 상영됐다. 특히 매회 20∼30명의 외국 게스트들이 참여, 신 감독에 대한 해외의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내년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프랑스 도빌영화제에서 신상옥 회고전을 연다는 소식과 ‘디렉터스 체어’ 전달식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하지만 정부의 압력으로 <탈출기>를 일반인을 상대로 상영하지 못한 점은 영화제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이번 영화제의 또다른 특징은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단편과 다큐로 구성된 와이드 앵글 부문의 매표율은 74%를 기록, 전 부문 중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53% 매표율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치다. 에밀 쿠스투리차의 <에밀 쿠스트리차와 노 스모킹 밴드>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ABC 아프리카> 같은 거장의 다큐멘터리나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 <약속> 같은 화제성 짙은 작품뿐 아니라, <세계 단편 걸작선> <세계 단편 애니메이션> <한국 단편:프로그래머의 시선> 등까지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관객의 입맛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WR: 유기체의 비밀> 등 두샨 마카베예프 특별전의 세편도 모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올해 부산영화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타이영화 특별전도 비교적 높은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킬러 타투>와 폐막작 <수리요타이>가 매진을 기록했고,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높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다. 타이영화의 매표율은 <잔다라>와 <수리요타이>를 제외하고 67%에 달했다. 미국과 유럽 인사들도 한국과 함께 세계영화계의 기린아로 떠오르는 타이영화를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타이영화인과의 만남’, ‘타이영화산업 세미나’(PPP) 등의 부대행사도 국내외 관계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열려 타이영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영화계의 스타들도 축제의 흥을 돋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심사위원장이기도 했던 세계적 거장 대만의 허우샤오시엔을 비롯, 누벨바그의 연인 잔 모로,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와 이와이 순지, 홍콩의 섹시 배우 종려시, 타이 뉴웨이브의 기수 논지 니미부트르, 일본의 스타 구보즈카 요스케 등이 PIFF 광장을 괴성으로 들뜨게 한 별들이었다. 하지만 두샨 마카베예프, 자크 드와이용, 브누아 마지멜 등은 가족 또는 본인의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뒤늦게 방한을 취소해 더욱 아쉬움을 남겼다.
운영면에서 이번 행사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게스트들이 늘어남에 따라 국내외 영화인들과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늘고, 환불 또는 교환 조치 등 예매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사실 등은 관객이 체감했을 개선 효과들이다. 해외 게스트들도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과 PPP 등 연계 행사의 존재, 게스트라운지와 프레스센터의 원활한 운영 등으로 전반적으로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새로운 오픈시네마 상영관인 BEXCO는 합격점은 넘어섰지만, 남포동을 오가는 교통문제와 불편한 의자, 시야를 가리는 구조, 웅웅거리는 사운드 등이 문제점으로 꼽혔다. 통역문제는 부산영화제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통역을 맡은 상당수 자원봉사자들이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관객과의 대화, 인터뷰 등에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각 영화제작사나 홍보사의 경쟁적인 홍보전에 대해 영화제쪽이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다보니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수선해졌고 갖가지 홍보물이 길바닥에 버려져 PIFF광장이 쓰레기장이 되다시피했다.
차기 과제는 충분한 재원확보
이번 영화제를 통해 가장 커다란 과제로 제기된 것은 안정적인 재원확보였다. 애초 조직위원회는 정부에서 10억원, 부산시에서 5억원을 조달하고 나머지를 티켓판매대금과 기업 스폰서로 조달하려 했으나 지난해에 비해 좌석 수가 4만석이 줄었고, 경기침체로 기업들이 약속과 달리 찬조금을 내지 않거나 액수를 줄여 운영비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날로 커지고 있는 규모에 비해 스탭과 자원봉사자들의 숫자가 충분치 않은 탓에 결국 관객은 좀더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없었다. 지난해 목표했던 300억원 기금 조성이 겉돌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영화제에 희망을 주는 것은 지난 11월1일 구성된 부산영화제 후원회 정도다. 100여명이 매년 100만원씩을 모아 70%는 영화제에 사용하고 30%는 이 지역 영화인력 양성에 쓴다는 이 모임은 부산지역 의료계, 학계 등의 인사들로 이뤄져 있다. 시민들이 부산영화제 지키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지금, 충분한 재원확보라는 공은 이제 정부와 부산시로 넘어갔다.
부산=문석 [email protected]▶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9일간의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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