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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앓이, 사람앓이
2001-11-21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email protected]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스산한 가을 바람에 멜랑콜리해졌거나 아름답고 슬픈 개인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프로젝트를 슬그머니 포기한 까닭이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제작자의 판단과 결정이 감독이나 작가에게는 비정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이 컸다. 영화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 나름대로 거창한 청사진을 그리면서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한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시쳇말로 ‘쪽팔리는 영화’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고(돈버는 오락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 절대 아님),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일로 상처주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작자가 감독이나 작가와 주고받는 큰 상처라는 건, 기껏 공들여 개발한 프로젝트를 감독이나 작가가 다른 회사에서 제작하겠다고 등을 돌리거나 제작사가 질질 끌다가 결국은 포기해서 감독이나 작가를 상심하게 하는 경우일 것이다. 아직 영화는 한편도 안 만들었으니 한 가지 다짐은 유효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지난 봄, 나이가 사십줄에 접어든 한 감독 지망생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수년 전 스치듯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끈이었다.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아는 유명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는 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다니던 빵빵한 직장 그만두고 삽십대 후반에 연출부를 했고, 몇년 동안 시나리오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처음 그의 시나리오를 보고 선명하지 않은 감은 있지만 묘한 매력을 느꼈다. 30대 남자들 이야기인데다가 간단치 않은 존재에 관한 성찰을 담은 ‘무모함’에 호감이 갔고, 올곧은 신념이 듬직해보이기도 했다. 덜컥 ‘추진해보자’는 약속을 했지만 한동안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마 뒤 감독이 매만진 시나리오를 다시 받았을 땐 녹록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상업영화로 풀어낼 요량을 하지 못했다. ‘시장’ 상황까지 감안하면 초보 제작자가 감당하기 버거운 프로젝트임이 분명했지만,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하는 수 없고, 결과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겠다”는 그의 ‘응원’에 기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몇번을 미루다가 11월 첫주, 결국 제작하기 어렵겠다는 ‘통지’를 했다. 본의 아니게 몇달을 질질 끌다가 내치는 관행을 답습한 꼴이 영 마뜩찮을 따름이었다.

회사 만든 지 채 1년도 안 됐지만 벌써 갈라서서 다른 제작사에서 제작 준비하는 감독도 있고, 갈 길을 달리한 프로듀서도 있다. 몇 차례 그런 소동을 겪으면서도 담담했던 것은 뭐라고 뒷말이 나돌아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을 지켰고, 이성적인 판단과 상식과 순리에 따른 당당한 결정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가슴앓이의 원인을 돌이켜보면 사람의 덫에 빠졌던 시행착오라는 생각이다. 영화 만드는 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영화처럼 창의적이면서도 고도로 산업화된 일은 사람보다 프로젝트를 중심에 놓고 타산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했다.

그로부터 ‘그동안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이메일 답장을 받은 날, 바쁜 일로 경황없는 직원들을 들쑤셔 노량진 수산시장에 술을 마시러 갔다. 하지만 술은 한잔도 안 마시고 콜라만 들이켰다…. 원래 술을 못 마시니까. 그래도 난 그날 취했다.

그가 언제가 보란 듯이 듬직한 영화를 만들어 나를 시사회에 초대하는 ‘반전’을 기대한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