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트 어웨이>가 또 2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톰 행크스 혼자 한 시간 이상을 떠들고, 혼자 뛰어다니는 ‘무인도영화’가 그만한 돈을 벌어들일 영화가 되리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리 톰 행크스 주연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로버트 저메키스는 <백 투 더 퓨처> 이후 할리우드의 주류에서 조금씩 엇나간 작품들로 승부해왔다. 지독하게 씁쓸한 <죽어야 사는 여자>나 변형된 미국 현대사를 그린 <포레스트 검프> 등등. 모든 작품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포레스트 검프>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는 만드는 작품들마다 흥행은 물론 화제를 모으는 데도 성공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스필버그처럼 거창하게 떠들지는 않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로 부족하지 않다. 물론 <왓 라이즈 비니스>처럼, 그냥 기분풀이, 또는 테크닉 실험용으로 만드는 아무 의미없는 ‘상업영화’가 필모그래피에 끼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캐스트 어웨이>는 다시 한번 로버트 저메키스의 진가를 보여준 영화다. <캐스트 어웨이>가 <로빈슨 크루소>나 <이녹 아든>의 변형이라는 데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캐스트 어웨이>는 생존의 기록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인도에서 생존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척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다가, 시간은 훌쩍 4년 뒤로 넘어가 버린다. 만약 근대정신의 수호자였던 <로빈슨 크루소>의 21세기판을 원했다면, 척이 무인도의 ‘시공간’을 어떻게 지배해가는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의 고독과 처절한 투쟁을 원했다면, 자살 앞에서 번민하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캐스트 어웨이>는 근대를 초월한,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가볍다고? 물론 가볍지만 그건 <포레스트 검프>의 깃털처럼 자유로운 바람 속을 거니는 사색의 결과다.
무한한 시간 속, 바다가 육지라면
<캐스트 어웨이>는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한 남자의 생존의 기록이 아니라, 격리된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한 남자의 궤적이다. <캐스트 어웨이>의 첫 머리는 페덱스의 간부로서,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는 척의 일상을 보여준다. 언제나 수첩을 꺼내들고 미래의 일을 계획하고, 정확한 약속을 잡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시간이 더디게 돌아가는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도 척의 위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은 척의 모든 것이다.그러나 척은 ‘금방 다시 올게’라는 약혼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병에 걸린 친구의 아내를 위해 전문의의 연락처를 알아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척에게는 오로지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이상 척은 시간을 지배하지 못한다.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척은 새로운 ‘시간’과의 투쟁을 해야만 한다. 세상에서 척의 시간은 타인들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은 비로소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무인도에서의 시간은 오로지 척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척이 무인도에 있는 동안, 척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땅에, 마음에 묻었다. 그들의 시간에서 척은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 4년 만에 돌아온 척은, 지나간 시간이 서로 다름을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이 처절하게 싸우는 동안, 타인들은 그를 잊으려 했다. 척이 돌아온다고 해서 그 시간이, 온전하게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켈리는 치과의사와 결혼했고, 친구의 아내는 죽었다. 그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단 하나 유일하게 뜯지 않은 화물, 천사의 날개만이 그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을 받아들이고, 교차로에서 자신이 지나가야 할 또다른 시간을 생각한다. 이 길로 가면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때 비행기를 타지 않고 켈리와 함께 있었다면, 지금의 시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흥미롭게도 이런 주제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출세작인 <백 투 더 퓨처> 3부작에서 이미 거론된 것이다. 어머니가 좀스러운 아버지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스포츠 승부조작으로 떼돈을 번 악당이 미래사회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로버트 저메키스의 말처럼 코미디, 어드벤처, 과학, 사색, 청춘, 로큰롤, 시간여행, 역사 등 모든 장르가 총괄돼 있는 <백 투 더 퓨처>는 가변적인 미래, 우연적인 세계를 가벼우면서도 신랄하게 그려낸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최고작인 <포레스트 검프> 역시 시간의 의미를 탐구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60년대 이후 미국의 역사를, ‘다른’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용광로처럼 들끓다가, 아이스 스톰처럼 일순간에 싸늘해진 미국의 현대사는 포레스트 검프의 시간을 통해서,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간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일관된 관심이었다. 그는 ‘영화의 과거사’를 궁금해 하는 관객을 위해, <백 투 더 퓨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의 전사가 궁금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전형적인 영화광 세대다. 그의 페이트론이자 스승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랬듯이. 195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로버트 저메키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8mm영화를 찍으며 영화감독을 꿈꾸었고, USC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스필버그를 처음 만난 것도 학부 마지막 해, 유니버설에서 현장학습을 하던 때였다. 스필버그는 막 <슈거랜드 특급>을 만든 뒤였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로버트 저메키스를 평생의 파트너인 밥 게일과 함께 <너의 손을 잡고 싶어>의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던 때에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비틀스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할 당시의 열광적인 비틀스 마니아의 소동을 그린 <너의 손을 잡고 싶어>의 시나리오에 흡족해 한 스필버그는 차기작인 코미디영화 의 시나리오를 부탁한다. 은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몇개의 에피소드가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활달함은 높이 살 만했다.
로맨스 소설가가 어처구니없는 모험에 휘말리는 코미디 <로맨싱 스톤>(1984)의 성공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는 흥행감독으로 자리를 굳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오락영화의 모든 것을 담은 영화’라고 극찬했던 <백 투 더 퓨처>는 3부작으로 만들어지면서, 저메키스 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추억과 꿈을 훌륭하게 재현한 <백 투 더 퓨처>는 겁쟁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가 시간여행을 벌이며 성장하는 영화다. 베이비붐 세대처럼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과거의 꿈과 기억을 되풀이하는 영화. 그러면서 저메키스는 자신의 영화 속에 몽상만이 아니라 악몽까지 재현한다. <백 투 더 퓨처> 2편에서 마티는 자신의 실수로 모든 미래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미래에서 악몽을 본 마티는 현재로 돌아오고, 정신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풀이하면서 현실을 교정하려 한다.
신산한 모험을 겪은 <백 투 더 퓨처>가 3편에서 서부극의 시대로 돌아간 것은, 저메키스와 함께 스필버그의 수제자인 론 하워드가 <파 앤 어웨이>에서 서부개척시대를 다룬 것과 동일한 이유다. 저메키스와 하워드 그리고 스필버그를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는 서부개척시대를 꿈과 희망이 살아 있던, 누구에게나 공정한 룰이 존재했던 시기라고 억측한다. 그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서부극의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 것과는 정반대의 탈정치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들은 프랭크 카프라의 유쾌한 시민정신을 이상으로 삼았고 자신의 영화에 담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아적인 순진함에서 머물렀다. <백 투 더 퓨처>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 신랄하게, 더 철학적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도 올랐던 <백 투 더 퓨처>의 대성공으로 로버트 저메키스는 마음대로 차기작을 고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저메키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에 도전했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워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인 얄미운 토끼 로저 래빗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디즈니의 캐릭터와 달리 노골적인 농담과 액션이 등장하는 워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밉살스럽고 폭력적이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더 신랄하고, 더 어둡고, 더 철학적인 것처럼. 로버트 저메키스의 야심이 슬쩍 가미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토끼가 자신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현실의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다. 80년대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만든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비틀린 블랙 유머가 가득하다. 이런 경향은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절정에 달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절묘하게 결합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에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현실과 환상을 하나의 시공간에 접합하는 놀라운 테크닉을 보여준다.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지워버리는 테크닉을 이용하여, 현실의 신비를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TV시리즈 <납골당의 미스터리>로 유년 시절의 취향이던 B급 호러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로버트 저메키스는 할리우드를 조롱하는 어두운 판타지 <죽어야 사는 여자>를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과 역시 당대 최고의 섹스 어필 골디 혼에 액션 영웅 브루스 윌리스를 기용하여, 기존의 스타 이미지를 완전하게 부숴버린다. 그들은 영원한 젊음에 집착하고, ‘신비의 묘약’에 의존하여 젊음을 지탱한다. 그러나 결과는 텅텅 비어버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육체뿐이다. 그건 마치 첨단 테크놀로지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은 할리우드에 대한 조롱처럼 들린다. 가장 앞선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로버트 저메키스는 물질성에 사로잡힌 인간의 헛된 욕망을 공격하고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야심찬 현대사회 비판은 <포레스트 검프>에서 계속된다. 미국 내에서만 3억3천만달러를 벌어들인 <포레스트 검프>(1994)는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톰 행크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아이큐 75의 포레스트 검프가 파란만장한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과거를 재편하는 <포레스트 검프>는 새로운 미국의 신화가 되었다. 진보적인 민권운동이 이끌었던 60년대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우직함 하나로 영웅이 된다. 모든 현대사의 이정표마다 검프는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것이 과연, 미국 현대사의 한 흐름인 민권운동에 대한 조롱일까. 로버트 저메키스는 원작의 신랄함을 오히려 줄이고 완만한 굴곡으로, 검프의 역사를 그려냈다. 혹시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 언제나 있었던,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대명사는 아닐까. 역사의 구비구비를 돌고 돌아 결국 길가 벤치 위에 앉아 있는 포레스트 검프와, 바람에 실려 하릴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던 깃털은 하나의 다른 존재는 아닐까. 그게 그냥 ‘생각없는’, 혹은 ‘즉자적인’ 몸짓에 불과할까.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로 가는, 가장 멀고 험한 길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
테크놀로지, 허구를 현실처럼
논란 많은 정치성은 무시한다 해도, 사실과 허구를 완벽하게 결합시켜놓은 <포레스트 검프>의 테크놀로지만은 눈부셨다. 케네디와 닉슨 등 과거 인물과 만나는 검프, 죽의 장막을 넘어 베이징에서 탁구시합을 벌이는 검프 등 역사의 현장을 담은 필름에 톰 행크스를 끼워넣은 테크닉은 정말 정교했다.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테크닉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만이 아니다. 검프를 케네디와 인사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화는 허구라는 고정관념이 허물어진다.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필름으로 남아 있지 않는, 이미 존재했던 과거가 아닐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시간을 <포레스트 검프>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 철학적인 테크닉은 97년작 <콘택트>에서 더욱 발전한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콘택트>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직접 출연한 것이 아니라 클린턴의 실제 영상을 따와서 배경화면과 합성하고, 컴퓨터로 변조하여 외계인과의 만남을 앞두고 침착하라는 연설을 하게 만든 것이다. CNN 기자 25명이 직접 출연하고, 실제 CNN 프로그램인 <래리 킹 쇼> <크로스 파이어>를 영화 속에 삽입하여 <콘택트>의 상황이 마치 사실처럼 인식되게 만든다. 칼 세이건의 미망인이자 작가인 앤 드루얀도 실명으로 <콘택트>에 삽입된 <크로스 파이어>에 출연해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허구는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적인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처럼 관객에게 호소하여, 공감을 느끼거나 카타르시스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나 소설 등 허구를 다루는 매체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TV의 보도 프로그램은 간혹 혼란을 느끼게 한다. 실제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면서 ‘실제 사건과는 관련 없음’이라든가, ‘자료화면’을 보여주면 시청자는 혼란을 느낀다. ‘재연 드라마’나 ‘사건 25시’ 미국에서 자주 방영되는 뉴스프로그램의 ‘추격장면’ 같은 것들도 그렇다. 그것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청자는 오히려 허구의 가상현실처럼 느낀다. 역으로 현실이 허구처럼 과장되고, 치장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부터 일관되게 환상을 통하여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현실’의 소재를 이용하여 ‘환상’을 창조하고, 그 환상을 통해 관객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콘택트>에서 앨리가 만난 것은 외계인이지만, 그것은 다른 얼굴의 자신, 다른 시간을 거친 자신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죽은 자신의 부친을 만난 것이다. 마치 <캐스트 어웨이>에서 척의 동료들이, 이미 마음 속에 묻어버린 척을 받아들이는 낯섦처럼. 그렇다면 척의 무인도는 어쩌면, 엘리의 외계인이 아닐까. 그들은 미지의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시공간의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을 만난다.
쉬어가는 영화들? 진정한 장인정신
그런데 로버트 저메키스는 <캐스트 어웨이>를 만들던 도중에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무인도에서 4년의 세월을 보낸 뒤 달라진 척을 연기하기 위해 톰 행크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톰 행크스가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20kg여를 감량할 동안, 로버트 저메키스는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톰 행크스의 준비가 끝나자 다시 <캐스트 어웨이>의 나머지를 찍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중간에 <쥬라기 공원>을 찍으며 ‘테크닉’이 녹슬지 않았나 실험해본 것처럼. 그들에게 영화란, 때로 오락이고, 때로 예술이다. 그걸 결정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캐스트 어웨이>의 의미심장한 질문과 달리, <왓 라이즈 비니스>에는 어떤 심층이 없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철저한 상업영화, 철저한 오락영화다. <왓 라이즈 비니스>의 탄생에는 이유가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1998년 제작자 스티브 스타키, 잭 랍케와 함께 프로덕션 이미지무버스를 설립했다. 기획회의에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서스펜스물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다. 마침 드림웍스에서 클라크 그레그의 <왓 라이즈 비니스>를 보여주었고, 저메키스는 바로 승낙했다. <납골당의 미스터리>라는 TV시리즈를 제작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로버트 저메키스는 ‘싸구려’ 오락영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어디까지나 팝 컬처의 자식인 것이다. 그 증거로 <왓 라이즈 비니스>는 딱 들어맞는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히치콕을 비롯한 스릴러 장르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장인의 세련된 작품이다. 자신의 서명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선뜻 손에 집어들 만큼 유려한.
로버트 저메키스가 번들거리는 80년대를 지나, X세대의 90년대를 거치고, 21세기에도 유효한 상업영화감독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철저한 장인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로버트 저메키스는 자신만의 철학도 지니고 있다. 교차로에 서 있는 척의 모습처럼, 로버트 저메키스는 어느 길로 가든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로 그것이 폭풍우라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무인도에 갇혀 있는 동안, 로버트 저메키스는 자기만의 시간을 유지하며 진정한 ‘휴식’을 취할 만한 인간이다. 전혀 다른 영화 <캐스트 어웨이>와 <왓 라이즈 비니스>가 하나의 시간 속에 공존하는 것처럼.
김봉석 기자[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