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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1]

한국영화 반세기의 신화가 부활한다

신상옥은 거대한 미궁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영화가 걸어온 길을 추적하기 위해 굴려놓은 실타래는 언제나 신상옥이라는 존재 앞에서 뒤엉키곤했다. 고유의 스타일을 모색한 작가이자 장르를 넘나드는 장인이며 국내 유일의 메이저 영화사를 만든 제작자였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는 거장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를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이라 일컬으며 회고전을 기획했다. <지옥화>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다정불심> <내시> <이조여인잔혹사> <천년호> <소금> <증발> 등 9편을 소개하는 이번 회고전은 감독 신상옥에 대한 궁금증에 답하는 것임과 동시에 잊혀진 한국영화 전성시대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씨네21>은 이번 회고전에 앞서 신상옥 갘독을 만났고 그의 영화세계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제 그의 필름과 육성의 도움을 받아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자.

인터뷰 현장에 미리 나와 있는 신상옥(1926∼) 감독을 보았을 때, 필자는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몇초 동안 그의 얼굴을 찬찬히 새겨보았다. 반세기의 신화가 거기 앉아 있었다. 한 나라의 영화역사에서 첫 번째 등급에 기록될 걸작들을 만들어낸 감독이자, 영화산업 시스템을 선도한 사업가인 동시에, 십여년에 걸쳐 매년 20여편 이상을 극장에 쏟아낸 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75살의 나이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의 그 매력적인 헤어스타일과 함께 감각적이고 활력있는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온 해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날짜조차 <아리랑>의 개봉일과 비슷하다고 강조하는 신상옥 감독은 한국영화사 1세대의 거장이자 한국영화 미학의 정초자였던 나운규를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꼽는다. 반면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여 실제적으로 영화를 배운 최인규 감독은 일제시대부터 해방 뒤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화려한 테크니션이었다. 여기에 또 한명의 영화스승으로 일컫는 찰리 채플린을 더하면 신상옥 영화세계의 지반이 드러난다. 자신이 속한 시대의 맥락을 직관하고 탐구하면서 당대의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다양한 심도로 포착했으며, 기술의 실험가이자 확고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장르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각 이미지를 아름답게 창조한 미장센의 대가, 게다가 개인 예술로서의 영화에 반대하고 철저하게 대중의 감성을 향해 승부하려 했던 승부사로서의 신상옥은 이렇게 세명의 앞선 거장들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을 우회적으로 언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신상옥의 활동이 본격화했던 1960년 전후는 영화계 내적으로 주류 영화산업 시스템을 모색하는 시기였고, 외적으로는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을 폈던 박정희 정권의 시기이기도 했다. 양자는 ‘기업화’라는 명분에 일치를 보았고 미국의 메이저 시스템을 본뜬 신필림의 거대한 발자국이 시작되었다. “박정희와 죽이 맞아 악덕 ‘영화법’ 제정에 앞장서고 신필림만 득을 보았다”는 세간의 쑥덕거림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화사가인 고 이영일은 신상옥을 알기 위해서는 “능글맞은 정도의 이해력과 관용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영일의 표현을 계속 인용하자면, 그의 내부에는 영화작가로서의 신상옥과 영화제작자로서의 신상옥이 지난 시기 동안 내내 공존해왔다. 그의 영화 편력은 영화라는 미디어와 인간 신상옥과 시대·사회라는 트라이앵글 속에서 불면불휴, 그야말로 치열하게 맴돌고 부딪치고 엉키면서 계속돼왔다. 그 속에서 신상옥은 영화를 발견하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위해서 살아왔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하게 ‘영화적 인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아기자기한 가정을 영위한다거나 여가를 보내기 위한 취미생활, 교우들과의 사교생활 같은 것도 없고 언제나 영화에 관한 대화뿐이었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했고 영화를 위해서 사는 그의 생활에 신상옥이 실존했다. 영화예술에 몰두했고, 그의 작품 속의 히로인을 아내로 삼았으며 불령(不逞)스러울 만큼의 의지로 영화의 왕국을 만들려고 기도했다. 신상옥은 영화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상옥 영화예술의 미와 함께 영화사회적인 모순 또는 트리비얼리즘도 함께 사랑하고 능글맞게 수용해야 한다(이영일, ‘신상옥론’, 계간 <영상시대> 1978년 여름호).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1975년 들어서 그의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던 박정희 정권과 불화가 생기면서 신필림의 영화사 허가가 갑자기 취소되었을 때 어느날 갑자기 북한의 공작원에 ‘납치’된 뒤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소금> <탈출기> 같은 또다른 대표작을 만들고 있는 신상옥의 80년대 편력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우상숭배’의 족쇄가 채워지자 매년 300만달러씩 펑펑 쓰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집어치우고 다시 남한으로 ‘탈출’하여 <마유미>(1990)라는 반공영화, <증발>(1994)이라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영화를 만들고 미국으로 가서 한동안 제작자 겸 감독으로서 활동하는 90년대의 편력 또한 지극히 신상옥적이다.

이처럼 신상옥의 영화활동은 크건 작건 영화계 안팎의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오락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신상옥의 폭넓은 영화세계 때문에 결국 ‘이번에는 무슨 영화를 어떻게 내놓을까’라는 호기심을 키우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

전통과근대의 대립,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데뷔작 <악야>(1952)로부터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지옥화>(1958)에 이르는 기간을 신상옥 작품 활동의 제1기로 꼽을 수 있다. 이때의 작품 경향은 리얼리즘과 문예 취향의 영화로 대별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상옥 작품세계의 원형을 이룬다. 1950년대 데뷔한 전후 세대의 감독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식민지의 흔적과 전란으로 피폐해진 채 근대화의 광풍에 휘말린 사회현실이 그를 리얼리즘의 세계로 이끌었다.

신상옥 영화 역시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체계로부터 근대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사회의 격렬한 혼란에 대해 호소하는데, 이같은 전통/근대의 대립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문제와 결합하면서 흥미로운 양상으로 번지곤 한다. 바로 ‘전통’을 섹슈얼리티가 탈색 혹은 억압된 여성으로, ‘근대’를 섹슈얼리티 과잉의 여자로 등치시키는 것이다. <지옥화>는 ‘근대성=매혹적이고 위협적인 여성’이라는 남성감독의 판타지가 탁월한 장르적 기교 속에 형상화된 작품이다. 숨막히도록 매혹적이지만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위험하고 타락한 존재, 이것은 영화 속 소냐의 이미지인 동시에 당대의 한국인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미국식 모더니티의 실체였다.반면 감독 스스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꿈>(1955) 같은 작품들은 현실과 분리된 일종의 초현실 세계 속에서 설화적인 인생관과 이상적인 미의식을 피력하는 작품 계열의 단초를 이룬다. 이영일은 이른바 ‘문예영화’가 경험적인 현실과는 격리된 액자 속의 이미지 세계라는 스타일을 공유하면서 고급의 작품이라고 포장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신상옥의 경우에는 이것이 작가 체질의 근저를 이루는 중요한 경향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집착이 결국 신상옥 영화미학 겸 한국적 영화미학의 한 정점으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이같은 설화적 세계가 실존함직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서 <성춘향>(1961) <연산군>(1961) <폭군 연산>(1962) <대원군과 여걸 민비>(1968) <이조여인 잔혹사>(1969) <내시>(1968) <속 내시>(1969) <이조괴담>(1970) 같은 사극으로 변주되어 섬세하면서도 장려한 내면의 드라마를 펼친다.

“여성이 주인공 아니면 영화 아니다”

1960년대 접어들면 위와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충동이 원숙한 작가의식과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 속에서 숙성되면서 행복한 성과를 맺는다. 감독 스스로 “남한에서 만든 것 중에 가장 잘된 것”으로 꼽는 <상록수>(1961)를 비롯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열녀문>(1962) <벙어리 삼룡>(1964) 등 이른바 신상옥의 미학을 대변할 만한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왔다.

이들 작품에서는 대부분 최은희가 아름답고 전통적인 여성으로서 수절하는 과부로 나오는데, 봉건적인 윤리와 여성의 인간적인 욕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면서 스러질 듯 휘황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오락성이 없거나 여성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나는 유교를 찬미한다”는 감독의 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처럼, 전통적인 질서 속에 살아가는 여성에 천착하면 할수록 전통의 미덕과 결점이 동시에 아로새겨진 주인공이 탄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상옥 개인의 특질인 동시에,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기류와 맞닿는 지점이 된다. 이영일은 “전통을 수용한 신상옥이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지점이자 한국인 자신이 그 윤리사상의 전환점에서 형상해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한국영화가 아로새기고 넘어가야 했던 숙제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이 경향은 다시 멜로드라마로 변주되어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홍성기 감독과 함께 대중의 일상적 감성을 어루만지고 영화산업을 살찌우는 주류 장르로 기능했다. 신상옥의 여성은 그의 작품세계를 펼치고 변주하는 주요 대상인 동시에, 후대의 우리에게는 당시 사회와 문화의 맥을 짚어내는 키코드로 읽힌다.

이 시기의 작품 가운데 몇편만 더 개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조여인잔혹사>(1968)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회 제도와 가족 규범의 본질을 여성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폭로한다. 네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에다 컬러와 흑백을 섞어 사용하는 등 형식의 파격도 두드러진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인 ‘금중비색’에서는 왕실 시중을 드는 궁녀(김지미)가 궐내에서 강간을 당하고 임신하게 되자 상궁 나인들이 똘똘 뭉쳐 은밀하게 출산을 돕고, 아이와 어머니를 궐 밖으로 몰래 내보내는가 하면 강간한 남자를 여자들의 치마로 묶어 죽인 뒤 연못에 빠뜨린다. 사극의 형식 속에 내포된 이같이 발칙한 전복성은 오늘날 ‘왕자 아기씨의 생산과 주상의 총애’에 넋을 잃은 TV사극 속의 주인공들을 한숨쉬며 되돌아보게 만든다.

원숙한 장르의 변주자

이십여개에 육박하는 각종 춘향전 영화 가운데 신상옥의 <성춘향>(1961)은 백미에 속한다. 이 시기의 영화 가운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군데군데 중요한 장면들이 잘린 채 출시돼 대가의 작품치고는 범작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 지난 2월에 타계한 홍성기 감독도 당대의 유능한 흥행감독으로서 같은 해에 <춘향전>을 만들어 한판 자존심 대결을 벌였는데, <춘향전>이 <성춘향>에 비해 훨씬 정교한 고증과 우아한 분위기를 지녔음에도 관객은 신상옥의 손을 들어줬다.

두 감독이 각자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확연하게 구별된다. 신상옥의 <성춘향>은 광한루에서 놀던 이도령이 방자와 수행 사령들에게 “상하의 구별을 다 치우고 함께 놀자”며 자상하게 술을 권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했다. 반면 홍성기의 <춘향전>은 이도령을 다재다능하지만 권위적인 엘리트주의자로 묘사해나갔다. 대중은 민주적인(!) 이도령을 택한 셈이다. 또한 차곡차곡 의미있게 구축된 춘향 캐릭터 덕분에 옥중의 춘향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부도덕한 권력에 온몸으로 저항한 여성에게 1960년 4·19를 정점으로 하는 민주주의 혁명시대를 살았던 관객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1960년 전후에 나온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배우게 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4·19와 5·16이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 다툼이 아니라, 해방 이후 새로운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건설할 것인지를 둘러싼 두 가지 집단적 소망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무렵의 영화들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4·19시대의 기운을 드러내는 반면, 신상옥 감독의 <쌀>(1963)은 특이하게도 5·16 방식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잘살아보겠다는 농민들의 처절한 투쟁에 공감하고 지원해 주는 유능하고 강력한 정부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숙자>(1968)라는 서부극 또한 이례적인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서부극에서 광활한 공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신상옥 감독은 황야에 대한 상상력이 대중의 집단적 기억에 남아 있는 시기를 찾아냈다. 바로 만주벌판을 유랑하던 일제시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남성주인공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달리 훨씬 가정 중심으로 수렴되면서 황야가 아니라 농토에 귀속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은희가 연기하는 여성주인공과 그의 어린 아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상과 좀더 순수하게 욕망에 충실한 두 가지 내면을 나누어 갖고 있는 분신으로 기능한다. 이 모든 것들은 서부극이면서도 액션멜로로 전이하는 한국적 장르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 형성

이처럼 현기증나는 다채로운 영화세계 때문에 신상옥은 “단일한 자아 대신 다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바쟁식의 작가가 아니라 푸코가 말한 담론의 발화자”라고 평가된다(김소영,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신상옥뿐만 아니라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등이 절정기의 작품을 쏟아낸 1960년대는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이 다양하게 형성된 시기이다. 할리우드 스타일과 시스템이 주도하는 상업영화, 유럽의 국제영화제가 주도하는 예술영화 사이에서 분열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서 ‘예술성’에 대한 강박관념 없이, 또한 심도 낮은 ‘오락성’에 매몰되지 않고 양 날개의 균형을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상옥의 영화세계를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그런 신상옥이 여전히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현역 작가로서 올해 부산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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