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섹스 없는 공산주의는 무덤이다”. 극중 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외친 인물. 결국 성도착자,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조국 유고로부터 축출당한 풍운아, 한때 고다르를 뛰어넘은 유일한 고다르 후계자로 불린 ‘실패한’ 거장 두샨 마카베예프가 일흔의 나이에 드디어 한국을 찾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과 그의 방한을 계기로 전설적인 괴감독 마카베예프의 도발적인 영화세상을 살펴본다.-편집자
“당신은 섹스에 관심이 있습니까?” 두샨 마카베예프의 두 번째 장편영화 <정사, 또는 전화 교환원 실종 사건>은 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성 과학자(sexologist)가 등장해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 그는 인간이 여전히 성에 대해 그리 많이 알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이란 것은 드러내놓고 이야기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낮게 속삭여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 과학자의 이런 언급은 아마도 감독인 마카베예프 자신의 영화적 탐구의 출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마카베예프라는 시네아스트는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금기에 도전한다고 할 만큼 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앎의 대상으로서 성에 대해 탐구하며 또 환경의 주요한 일부로서 성을 그 컨텍스트(정치적 환경)와 연결지어 고찰해보려 고투한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 세계 영화계로 번져나간 ‘뉴웨이브’ 열풍은 확실히 새로운 스타일의 고안과 더불어 성의 노골적인 표현쪽으로 경도된 것이었다. 마카베예프의 경우를 놓고 보자면 그는 단지 성에 대한 탐구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그런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내기 위해 낯설면서도 혁신적인 미학을 창출해낸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뉴웨이브의 이 두 가지 경향을 가장 대담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한 이로 첫손에 꼽힐 만한 시네아스트일 것이다.
“동유럽 영화의 초석”
1932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마카베예프는 베오그라드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연극·라디오·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멤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찍부터 영화평론을 썼고 여러 편의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던 그는 이미 그 당시부터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나 장 뤽 고다르의 선례를 따라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마카베예프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것은 경직된 정치영화가 결코 아니었다. ‘영혼’을 가진 정치영화, 그리고 감정과 유머를 간직한 정치영화가 그가 만들고픈 영화였다. 나중에 실제로 그가 만든 영화들을 보건대 이처럼 지루하지 않고 둔감하지 않은 정치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는 일정 정도 실현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카베예프는 66년에 첫 장편영화 <남자는 새가 아니다>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이 첫 영화는 “동유럽영화의 초석”이란 찬사를 받았고, 그러면서 그는 알렉산더 페트로비치, 지보진 파블로비치, 푸리스 디요르디예비치 등과 함께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영화를 만들어나갈 기대주로 주목받게 되었다.
마카베예프 영화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관심사는 섹슈얼리티와 정치적 변혁 사이의 관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마카베예프는, 에서 그가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를 따라서, 어떠한 정치적 변혁이나 해결도 인간 육체의 행복이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두 연인의 성적인 결합을 구사회의 상징인 교회의 파괴와 나란히 놓은 <정사>의 한 장면에서 흐릿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정치적 해방은 개인의 육체적 쾌락, 혹은 성적인 해방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카베예프가 영화 속에 때로는 음란하다는 불평을 살 만큼 대단히 자유분방하게 섹슈얼리티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주로 자유/억압(또는 진정으로 변혁을 이룬 새로운 사회/여전히 억압이 존재하는 구사회)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함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개인들과 그들이 속한 국가의 요구가 충돌하는 양상을 지켜봄으로써 그는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구축된 새로운 사회의 속내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예컨대 <정사>도 <WR…>도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러니까 동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여성과 공산당에 충실히 속해 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사회에 속하지만 욕망에 관해서는 구사회쪽에 더 가까운 남성 사이의 만남과 결합을 보여준다. 두 영화 모두에서 여성주인공은 상대 남성에 의해 고의든 아니든 죽임을 당한다. 이걸 통해 마카베예프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성적인 해방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사회, 즉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는 아닌 그런 사회, ‘혁명’이 아직 완수되지 못한 미완의 사회라고 진단한다(마카베예프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풀이는, 물론 정리를 위해 어느 정도 단순화한 것이다. 조금 더 파고들면 그의 영화는 더 복잡해지고 심지어는 혼란스런 양태마저 보여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 영화를 위해
기존 체제에 대해서, 고정되어 있고 교조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마카베예프는 자신의 영화를 가리켜 ‘게릴라’라는 명칭을 붙인다. 그런데 그는 이 게릴라라는 단어를 자기 영화의 다른 측면, 즉 형식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한다. “보도블록, 불, 총탄, 슬로건, 노래 등 게릴라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어떤 무기도 이용할 수 있다. 이건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픽션이든 다큐멘터리든 또는 다른 어떤 것이든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다. ‘스타일’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신은 심리적 무기로서 기습(surprise)을 감행해야 한다.”
그 자신의 이런 신조에 따라 마카베예프 영화는 픽션이든 다큐멘터리든 또는 자료 화면이든 입수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것이면 어떤 재료든 마구 이용한다. <정사>는 위생 검사원 아흐메드와 전화 교환원 이사벨라 사이의 사랑을 그린 허구적 멜로드라마에 성 과학자와 범죄학자의 코멘트 등이 교차되어 있는 영화이고, <보호받지 못한 순수함>은 1942년 나치 점령기에 만들어진 세르비아 최초의 유성영화와 그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뉴스릴 필름 등이 착종되어 있는 영화다. 한편 <WR…>엔 빌헬름 라이히에 대한 기록 필름, 미국사회의 성문화를 담은 필름, 프리섹스를 부르짖는 유고 여인 밀레나와 소련인 스케이트 선수 블라디미르 일리치 사이의 파괴적 관계를 다룬 픽션 필름 등이 이리저리 꼬여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카베예프 영화들은 크게 보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는 수평적인 축과 시간적 차원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수직적인 축으로 구축된 특별한 세계이다. 그 세계 안에서는 여러 차원들, 혹은 부분들이 때로는 서로 공존하고 또 때로는 충돌하거나 보완해준다. 그러면서 급진적 지성과 도발적인 유희 정신이 만나는 그 세계의 의미망은 점점 두터워진다. 이렇게 구축된 마카베예프 영화는 그야말로 ‘다차원적인(multidimensional) 영화’라 불릴 만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마카베예프의 이런 세계는 다른 많은 영화감독들을 불러들인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마카베예프 영화는 변증법적 몽타주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을,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실험한다는 점에서는 고다르를, 정치영화의 형식을 급진화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오시마 나기사를, 또 필름 위에 시적인 에세이를 쓰려 한다는 점에서는 크리스 마르케를, 성적 표현의 한계에 대해 눈감는다는 점에서는 러스 메이어까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고와 콜라주 형식 둘 다를 급진화한 마카베예프 세계는 분명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고유한 세계였다. 데뷔작 <남자는 새가 아니다>부터 <WR…>에 이르는 그의 유고 시절 영화들은 새롭고 좀더 자유로운 영화 만들기의 시대를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건 결코 과분한 찬사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혹은 안티필름(antifilm)의 한 모델로서 그의 세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카베예프의 유고시대, 즉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짧은 시기로 한정된다고 보면 된다). ▶ 두샨 마카베예프, 성과 혁명의 게릴라(1)
▶ 두샨 마카베예프, 성과 혁명의 게릴라(2)
▶ 마카베예프가 말하는 마카베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