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한강에 의문의 시체가 떠오른다. 이 사건을 뒤쫓는 오 형사(이정재)는 현장에서 발견된 명함 조각, 특수제작된 일제 안경테에 주목한다. 피살자 양달수의 방에 있던 사진을 쫓아 거제도를 찾은 그는 손지혜(이미연)의 한국전 당시 일기장에서 거제 포로수용소를 둘러싼 비밀에 접근한다. 포로인 손지혜를 사랑하던 황석(안성기)은 비전향 장기수로 50년 형을 살고 최근 출감했다.■ Review 영화 도입 부분, 화사한 신부가 잘못 던져 강물에 빠진 부케 아래로 시체가 떠오르는 장면은 <흑수선>이 앞으로 펼쳐나갈 세계를 암시한다. 이 장면은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오 형사가 그 사건 뒤 어딘가에 숨어있는 황석, 한동주, 그리고 ‘흑수선’이라는 암호의 손지혜와 만나는 곳이자, 50여년 전 뜨거운 피와 눈물로 얼룩졌던 과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빤질하게 솟아있는 현재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시체는 마치 50년동안 잠들었다 되살아난 사신(死神)처럼 또 다른 죽음들을 불러내고 비련의 시간들을 무참하게 끄집어올린다. 배창호 감독은 비극으로 운명지워진 과거의 인물들이 혜성처럼 지금 우리 곁을 스쳐지나는 광경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나간다. 오 형사라는 인물에게 역사의 거대한 동굴을 탐사하는 임무를 맡긴 그는 촘촘하게 얽어놓은 플롯을 빠른 속도로 진행시키며, 미스터리와 흥미를 증폭시킨다. 화려한 액션 장면과 긴장감 넘치는 화면구성 또한 관객의 시선을 확실하게 붙드는 요소.
규모와 장르적으로 배창호 감독의 기존 작품세계와 상당히 멀리 놓여있는 듯한 이 작품이, 그럼에도 ‘배창호표’임을 드러내는 요소는 이야기의 바닥에 단단하게 붙어있는 멜로라는 암각화다. <흑수선>의 세계에서 황석과 손지혜의 사랑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사랑 때문에 황석은 이념싸움의 희생자가 되고, 손지혜는 이념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난다. 과거의 주인공들을 옭아맨 운명의 쇠사슬과 극도의 고통도 따지고 보면 절절한 사랑 때문이며,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 또한 둘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에서 기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토록 중요한 남녀의 순애보가 단순히 내레이션에만 의존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널 다시 만나기 위해 난 꼭 살아있을 것”이라든가 “(황석에 대한 사랑이) 긴 어둠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라는 등의 대사가 수차례 반복됨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인물들의 살아있는 감정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아닌게 아니라 <흑수선>은 빠른 화면전개와 거대한 스케일이 돋보이지만, 회상신 중 대부분을 극중인물의 보이스오버로 처리해 내러티브와 스펙터클이 분리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배창호 감독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랜 시련 끝에 마침내 대중의 곁에 다가온 그는 극중 대사처럼 ‘바위 틈을 뚫고 살아난 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