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최종 편집이 끝날 때까지는 어떤 작품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반이라지만 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란 대강의 줄거리일 뿐이며, 줄거리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오! 수정>의 평에서 프랑스 <리베라시옹>의 장 막스 랄란은 “극 구성의 완전히 자의적인 어떤 요소가 모든 정당화 시도를 어렵게 만든다”고 썼다. 앞뒤가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그의 영화를 명료한 이야기로 요약하거나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자의적인 디테일들도 거의 즉흥 연출로 태어난다. 홍상수의 영화는, 차라리 편집이 반이다.
작업이 진행중인 그의 신작 <생활의 발견>은 아예 시나리오가 없다. 이건 놀랍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홍 감독에게 시나리오는 그저 제출용이었을 뿐이며, 그는 제출된 시나리오에 충실한 적이 없었다. 전작들을 찍을 때도 촬영 30분 전까지 대사를 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홍 감독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리 정해놓는 건 재미없다. 촬영하는 날 이거 예쁘겠다, 재미있겠다 싶은 게 떠오르면 그걸 찍는다”라고 말한다. 이젠 홍 감독의 스타일이나 그의 즉흥연출의 힘을 익히 알고 있는 제작사도 굳이 번듯한 시나리오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번엔 시나리오 대신 제출한 30여쪽의 파일에 줄거리와 연출 의도를 담아놓았다. 그걸 토대로 홍 감독은 촬영 당일 아침에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낸다. 연출부가 촬영장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테이블과 노트북 그리고 프린터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부스스한 얼굴의 홍 감독이 등장해 30분∼1시간 만에 많아야 두세쪽 분량의 대본을 써내면 그 자리에서 프린트돼 스탭과 출연진들에게 배포된다. 물론 꼼꼼한 대본이 아니라 대강의 상황과 대사뿐이지만 그것조차 찍으면서 수정된다. 촬영 전날까지도 “시나리오 없어. 푹 쉬었다 와”라는 홍 감독의 말을 전해듣고 어처구니없어 하던 주연배우 김상경도 이젠 이력이 나서 “이게 재미있다”고 말한다.
즉흥연출이 빚는 자연스러움
이런 방식이 스탭과 출연진들에게 속편한 점이 없진 않다. 당일 촬영이 끝나면 다음날 준비할 거리가 없으니 마음놓고 쉴 수 있는 것이다. 해가 지면 술 먹거나 게임하는 게 거의 정해진 일과가 됐다(특히 술을 많이 먹는다). 물론 이 과정이 홍 감독에게 완전한 휴식은 아니다. 술 먹고 밥 먹다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누군가의 말이 다음날 대사로 되살아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술 먹고 떠들다가 홍 감독이 갑자기 메모를 시작하면 누군가, 야 저거 내일 시나리오에 나온다, 고 농을할 정도가 됐다.
물론 즉흥연출은 스탭에게도 연기자들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연기자들은 김상경의 말을 빌리면 “연기도 아니고, 연기가 아닌 것도 아닌”, 그래서 어설프면서도 그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야 한다. 계산되고 준비된 연기가 아니라 즉석에서 극중 인물과 가장 가까운 조건과 상태를 만들어낸 뒤 그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술 먹는 장면에선 실제로 술을 먹어야 한다(홍 감독의 영화는 유난히 술 먹는 장면이 많은데 <생활의 발견>도 예외가 아니다).
10월23일, 김상경과 추상미가 경주의 한 식당에서 삼겹살을 곁들여 술을 먹고 거리에 나서는 장면 촬영에서, 술은 세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김상경은 소수 두병을 사이다와 섞어 억지로 들이부었다(전날 밤에도 세병 마셨다). 술이 약한 추상미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마셨다(그녀 역시 전날 밤 백세주를 세병가량 마셨다). 물론 감독의 요구다. 이제 곧 취기가 오른 총각(김상경)은, 팔짱을 낀 채 바짝 붙어 걷고 있는 역시 불그레한 얼굴의 유부녀(추상미)에게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정말로요. 건드리지 않으면 되잖아요”라는 지극히 홍상수적인 대사로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모방은 나의 힘?
<생활의 발견>은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짧은 연애담이다. 물론 연애담이라고 해도 낭만보다는 누추한 욕망이 앞서는 메마른 육담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김상경이 맡은 무명배우 경수가 선배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 그곳에서 선배를 따라나온 명숙(예지원)이란 여자를 만나서 잠시 연애한다. 춘천을 떠나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경수는 기차간에서 경주에 사는 선영(추상미)이라는 여자를 만나 함께 경주에 내린다. 선영은 유부녀지만 경수는 춘천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접근한다.
극히 홍상수적인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보면 전작들과 다른 데가 있다. 홍 감독은 한 작품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연속성을 갖는 단일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네 주인공이 각기 중심인물이 된 네 가지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강원도의 힘>은 엇물린 시간대에 비슷한 곳을 여행하는 남녀의 이야기가 각각 전반과 후반을 채운다.
<오! 수정>은 아예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기억이 영화의 본론이다. 춘천에서 경주로의 이동을 기점으로 전후반이 나뉘긴 하지만 <생활의 발견>은 표면상의 구성에선 전통적인 이야기체 영화에 가장 가까운 셈이다. 혹시 홍상수 감독은 좀더 단순하고 그래서 조금은 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홍상수 감독은 <오! 수정>을 찍고 나서 “조금은 굵은 언어로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내게 익숙한 것들을 조금 버리고 일정한 제약과 만나고 싶다. 그러면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앞선 세 작품에서 거의 완전한 자유로움을 누렸고, 그 자유로움 덕에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독창적 형식의 신천지에 이르렀다. 이건 드문 행운이었지만, 이게 항상 최선의 조건은 아닐 수 있다. 홍 감독의 역설적인 소망은, 상업적인 구속이 아니라 그를 만나 형식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는 텍스트상의 제약이라면 오히려 한 감독에겐 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 무렵 홍 감독은 얼핏 시대극이나 전기영화에 대한 관심을 말하기도 했다.
단언하긴 힘들지만 <생활의 발견>은 대강의 윤곽만으로 판단하면 혹시나 누군가 예상할지 모를 홍상수 월드의 대대적인 변화를 기도하는 영화일 것 같진 않다. 대신, 여전히 홍상수적인 디테일 안에서 일상의 감춰진 어떤 요소를 탐구하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오! 수정>에서 그 요소가 ‘기억’이었다면 <생활의 발견>에선 ‘모방’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 의견인 것처럼 말하거나, ‘이게 자연스러워’ 혹은 ‘이건 내 진심이야’라고 믿으며 행동할 때, 실은 누군가의 것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뜨끔하지만 <생활의 발견>에 담길 모방은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홍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모방은 여러 차원에서 여러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어딘지 허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짐작건대 <생활의 발견>의 전반과 후반은 서로 닮아 있으며, 이 둘은 모방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를 속여왔음을 고백하게 할 것이다.
계산보다 직관을, 결과보다 과정을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많은 걸 점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홍상수의 전작들은 키워드 하나로 끼워맞출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으며, 어떤 예상도 무색하게 만든 발견의 기쁨을,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당했다는 열패감을 어김없이 선사해왔다. <생활의 발견>도 아마 그럴 것이다. 홍 감독 자신도 “나중에 다 모아봐야지 알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른 경우라면 무책임하거나 너무 젠체하는 것처럼 보일 이 발언은 홍상수의 영화라면 진심으로 들린다.
홍상수 영화는 고도로 계산된 연출의 산물이 아니다. 홍 감독은 여전히 계산보다는 직관을, 결론보다는 과정을 믿으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홍 감독은 마음을 끄는 대상을 예쁘다, 귀엽다, 재미있다고 표현하는데, 그게 그의 미학적 선택의 기준도 된다. 우리가 워낙 깊이 감춰둬, 그곳에 있는지조차 잊었던 것들을 홍 감독은 그렇게 단순해보이는 직관으로 귀신같이 집어낸다. 8월 말에 촬영이 시작된 홍상수의 네 번째 실험 <생활의 발견>은 이번주에 촬영을 끝내고, 내년 초에 관객을 만난다.
허문영 [email protected]▶ 촬영 막 끝난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엿보기
▶ 캐스팅은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