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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방
2001-10-30

시사실/라이방

■ Story

창진운수 택시기사 해곤(김해곤), 학락(최학락), 준형(조준형)은 일이 끝나면 함께 치킨집에 모여 생맥주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친구들이다. 별볼일없는 30대 아저씨인 그들에게 자랑거리란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삼촌 이야기 혹은 대학 나온 티를 내는 것이다. 어쩌다 유한마담한테 걸려 하루 일을 제쳤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고. 어느날 회사 상무가 택시기사들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사건이 생긴다. 식사 때마다 공기밥만 추가해 먹으며 한푼두푼 저축해 모은 1500만원을 떼인 준형은 앞이 캄캄해진다. 그는 학락에게 일생 한번만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되자고 제안한다.

■ Review

데뷔작 <걸어서 하늘까지>부터 98년작 <남자의 향기>에 이르기까지 장현수 영화는 언제나 가파른 신분상승의 드라마와 음험한 범죄세계의 질서가 충돌하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죽음과 맞서지만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관객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극장을 나서야 했다.

장현수에게 액션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준 <게임의 법칙>이 이런 스타일의 정점이라면 다음부터는 내리막이었다. <본투킬>과 <남자의 향기>는 호평을 받기에 미흡한 요소가 많은 작품이었다. 다섯 번째 영화 <라이방>은 그의 대표작이 <게임의 법칙>이라 믿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임에 분명하다. 이번 영화는 장현수의 전작들과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이것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멜로드라마도 피흘리며 쓰러지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액션영화도 아니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30대 택시기사 세 사람을 카메라 앞에 불러들인 <라이방>은 허물없는 친구 대하듯 말을 건넨다. 솔직하고 꾸밈없지만 농담하는 여유도 잊지 않는 <라이방>의 태도는 이보다 한주 앞서 개봉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연상시킨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꿈이 사라졌지만 꿈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자들의 슬픔을 본다면 <라이방>에는 고단한 현실을 술과 친구와 유머로 이겨가는 궁색한 인생의 아픔이 들어 있다. 그것은 웃고 있어도 가슴을 찌르는 것이지만 비극을 향해 치닫는 이야기는 아니다. <라이방>이 전하는 삶의 온기가 감독의 진심이라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세명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 <라이방>의 인물들이 처한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늙으신 어머니에다 결혼에 실패한 형까지 모시고 사는 준형의 집안 풍경은 그들의 공통된 처지를 한눈에 짐작게 한다. 준형 혼자 벌어 모두를 먹여살리건만 하루 종일 운전하다 돌아온 그에겐 따뜻한 말 한 마디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와 형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TV만 바라보고 삶에 지친 아내는 딱히 잘못한 거 없는 남편을 향해 악을 쓴다.

가파른 드라마를 만들지 않고 담담히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라이방>은 학락이나 해곤에게도 준형만큼 안타까운 사연이 있음을 들려줌으로써 세 사람의 이야기를 포개놓는다. 학락은 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임을 포기해야 하고, 해곤은 짝사랑하던 연변처녀가 칠순 할아버지에게 시집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 그들은 정말 불행이 선택한 사람들일까? 대낮부터 술에 취해 악다구니 쓰는 형을 피해 준형은 어린 아들과 골목에 나란히 앉아 이를 닦는다. 짧게 스쳐가지만 이 장면은 <라이방>의 정서적 실체를 대변한다. 지치고 힘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장면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불행의 품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에게 과연 출구는 없는 것일까? 장현수 감독은 묘하게 겹쳐놓은 세 인물을 낯선 공간에 몰아넣고 그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답을 구한다. 겁에 질린 학락이나 술에 취해 정신없는 해곤이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준형이나 모두 한 사람의 양심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인다. <죄와 벌>에 대한 재치있는 패러디인 이 대목에서 승자는 역시 불행이지만 패자들도 당당히 웃을 자격을 얻는다. 그들은 끝내 불운을 이기지 못했지만 희망만은 빼앗기지 않는다.

98년 12월에 기획돼 1년간 연기연습과 시나리오 수정을 거쳐 45일간 연극 무대에도 올려지는 특이한 제작과정을 거친 <라이방>은 감독의 표현대로라면 ‘배우의 영화’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화려한 액션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의 스타일은 철저히 배제하고 정직하게 연기자의 표정과 대사와 행동을 쫓아간다. 때로 균형이 위태로운 순간도 있지만 자연스런 친밀감을 불러오는 세 배우의 연기는 충분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들은 꾸미지 않은 얼굴만으로도 삶의 그늘과 주름을 그려내며 카메라는 가만히 그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보잘것없는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거꾸로 여기서 장현수의 변신은 성공적이다. 시스템의 영화에서 할 수 없는 작업을 통해 그는 전보다 넓고 깊은 영토에 성큼 한발 내디뎠다. <라이방>은 배우의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손길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감독의 영화’이다.

남동철 [email protected]▶ 개봉작 - 라이방

▶ <라이방>의 세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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