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휘장 뒤의 영화
고전기 할리우드로부터 <물랑루즈>로 이어지는 백스테이지 뮤지컬의 이상은 “쇼는 계속돼야 한다”(The Show must go on)로 요약된다. 사랑을 찬양하고 쇼를 숭배하는 이 모토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자 염원이며 기도다. 우리가 기억하는 뮤지컬의 어떤 대목을 떠올리건 거기에는 낭만적인 구애의 시퀀스가 들어 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진 켈리는 비를 맞으며 춤추고 뉴욕의 로미오를 만난 내털리 우드는 <Tonight>를 노래한다. 비극을 향해 치닫는 이야기지만 <물랑루즈> 역시 사랑의 신화를 갈구한다. 이완 맥그리거가 엘튼 존의 <Your Song>을 부르면서 시작되는 두개의 구애 시퀀스는 천상의 로맨스처럼 보인다. 바즈 루어만에게 음악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연인들의 어깨에 날개가 솟구쳐 구름 저편으로 날게 하는 마술이며 초능력이다. 영화는 마지막 대목에서 다시 한번 그런 믿음을 확인한다.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던 젊은이의 귀에 들리는 노래는 오해와 갈등을 지워버린다. <물랑루즈>에서 배우는 직접 노래를 부른다. 이완 맥그리거와 니콜 키드먼이 노래를 부를 때 관객이 받는 얼마간의 충격은 이것이 할리우드에서 오랫동안 볼 수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즈 루어만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인기절정인 인도의 뮤지컬을 끌어들이며 노래하는 배우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호소력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즈 루어만은 단 세편의 영화를 만들어놓고 자신의 영화 세계에 스스로 현판을 써서 내건 재미있는 사람이다. 좀 낯뜨거운 행동이긴 하지만, 공격적인 스타일을 지닌 그의 영화들을 생각하면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도 어느 평론가가 반드시 했을 법한 일이고 그렇다면 당치 않은 이름이 붙기 전에 손수 작명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다. 바즈 루어만이 <댄싱 히어로> <로미오와 줄리엣> <물랭루즈>를 묶어 일컫는 이름은 ‘레드 커튼 시네마’, 즉 ‘붉은 휘장 뒤의 영화’.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연극화된 영화, 무대 연출의 기교와 트릭을 흡수한 영화를 뜻하는 말이다. 바즈 루어만 영화의 프레임 안에는 보이지 않는- 때로는 실제로 보이는- 프로시니엄 아치(연극 무대 위쪽을 가리는 아치)가 세워져 있다. <댄싱 히어로>는 붉은 커튼과 댄서들의 실루엣을 표지로 삼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어린 연인의 죽음을 보도하는 뉴스가 영화 앞뒤에서 액자 노릇을 하고, <물랭루즈>는 심지어 이중삼중의 문턱을 통과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붉은 막이 오르면 20세기폭스의 유서깊은 로고가 팡파르와 함께 뜨고, 무성영화시대의 자막 카드와 함께 로트렉이 크리스티앙을 소개하고, 그제야 크리스티앙은 타자기 앞에서 회상을 시작한다.
꾸밈없는 현실을 열쇠구멍으로 엿보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하는 주류 내러티브영화와 달리 이처럼 바즈 루어만 영화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커튼을 걷고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즈 루어만은 관객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로 인해 흥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즐기기를 바란다. 그랬을 때야 비로소 루어만이 사랑해 마지않는 관객의 능동적 참여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붉은 커튼을 걷으면 나타나는 바즈 루어만의 영화 세상을 지배하는 첫 번째 슬로건은 “이야기는 가능한 한 얇고 심플하게!”다. 세편의 루어만 영화가 가진 패턴은 신화적 원형에 가깝다. 착한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세상과 살을 섞느라 타락했거나 과거의 죄업으로 얽혀 있는 늙은 세대의 아집과 욕심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젊은 연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지순한 사랑을 확인한다. 종종 사랑의 확인만 남긴 채 하늘은 둘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그들의 열정이나 비극은 구세대를 결국 화해로 이끈다. <댄싱 히어로>는 오만한 신(권위)에 대적한 젊은이의 사랑과 모험을 그린 영웅담이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애담 <로미오와 줄리엣>은 심지어 셰익스피어 이전의 이탈리아 서사문학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나아가 그리스 신화의 피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에 연원한다. “세상에서 당신이 배울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라는 백만년 묵은 주문을 반복하는 <물랭루즈>의 크리스티앙은 ‘물랑루즈’라는 명부에 뛰어들어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시로 구원하려 하지만 끝내는 죽음의 늪에 연인을 떨어뜨리고 만다. 사신의 손아귀에서 에우리디케를 되찾아오다 손을 놓친 오르페우스처럼. <물랭루즈>의 이처럼 원형에 가까운 단순한 내러티브를 통해 루어만이 얻는 미학적 효과는 두 가지. 관객과 영화를, 관객과 관객을 아주 원초적인 레벨에서 연결시켜 준다는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이야기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고 영화가 창조한 인공적 세계의 재미에 느긋이 몰입하게 한다는 점이다(<물랭루즈>는 아예 처음부터 “그녀는 죽었다”고 선언한 뒤 이야기를 전개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루어만은 “신화적 내용을 다룰 때는 모든 사물을 눈이 아릴 만큼 명명백백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과 돈이 대결하는 신화적 스토리의 <물랭루즈>는 대중문화의 신화적 캐릭터라 할 만한 고전 뮤지컬 <캬바레> <프렌치 캉캉>의 인물들과 마릴린 먼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명료한 이미지, 20세기를 풍미한 연가들로 살을 붙인다. '믹스 앤 매치'스타일리스트 이야기는 변하지 않으며, 다만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 바뀔 뿐이라고 믿는 바즈 루어만 감독은, 인위적으로 지어낸 고양된 세계를 고도의 통제와 많은 노동으로 빚어낸 ‘진정성을 지닌 인공물’로 채운다. 그리고 그 정교한 인공 정원 안에서 그리스 비극을 영원하게 만든 근원적인 감정의 샘물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적 체험은 지나치게 직접적인 사실주의 영화들은 움직일 수 없는 건조하고 냉정한 관객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바즈 루어만은 믿는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도그마가 있다. 라스 폰 트리에 등의 도그마영화와 우리의 궤도는 어떤 의미에서 비슷하다.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의 초기작은 거리에서 촬영한 16mm 다큐멘터리였다. 원초적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 기본적 멜로드라마를 비틂으로써 아주 직접적인 감정에 접근하는 점에서 내 영화와 도그마영화는 닮았다. 모든 훌륭하고 깔끔한 스토리는 멜로드라마다. 어떻게 보여주거나 숨기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공적 장치들일 뿐이다.” <댄싱 히어로>에서는 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시가, <물랑루즈>에서는 음악이 그 인공물의 파노라마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댄싱 히어로>에서 정격을 깨는 주인공의 춤이 좌중을 술렁이게 하는 장면에서 권위적인 볼룸 댄스 협회장은 일갈한다. “관객이 뭘 알아? 그저 신기한 동작이나 좋아하지.” 그러나 바즈 루어만은 그의 주인공 스콧처럼 태생적으로 챔피언십보다 객석의 환호를 구하는 파격의 댄서다. 1978년 <그리스> 이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수익성면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던 뮤지컬 장르를 심지어 여름 개봉작으로 제작하는 모험을 폭스가 감행한 이면에는 흥행사로서 바즈 루어만이 지닌 힘이 도사리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19세기적 인식을 버리는 데 1년의 공부가 필요했다”는 그의 회고대로, 모든 계급과 취향의 관객을 매료한 셰익스피어 극의 교훈을 받아들인 루어만은 직선적인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단순한 스토리에 음악과 춤의 스펙터클을 얹은 루어만 영화의 흥행성은 일면 액션 블록버스터의 그것과 상통한다. 다만 루어만 영화 속의 형식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줄거리보다 더 많은 의미를 발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루어만 영화의 또다른 매력은 잡종의 힘, 혼혈의 아름다움이다. 여장남자가 가장 무도회의 군무를 주도하고 당구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오가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미 “클래식 문화건 팝 문화건 그것이 드라마 속에서 인간이 처한 조건을 드러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주저할 것이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던 바즈 루어만은 시대착오에 관대한 장르 뮤지컬의 특허까지 가진 <물랭루즈>에 이르러서는 특유의 ‘믹스 앤 매치’ 스타일을 마음놓고 추구한다. 몇해 전 인도를 방문한 바즈 루어만은 발리우드 영화에 매혹되었다고 고백한다. “원초적 코미디와 극단적 비극, 노래가 어울린 영화가 세 시간 반 동안 계속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와 일행은 우리가 갑자기 힌두어를 깨우친 줄 알았다.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의 장대한 화음과 관객과 하나되는 열광. 그것이야말로 바즈 루어만이 열망하는 영화의 이상일 것이다. 루어만 영화는 그처럼 관객에게 팔을 벌리지만 한순간도 관객에게 따라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지키며, 키치와 숭고미 사이에 밧줄을 걸고 아크로바트를 펼친다. 그가 세운 엑스터시의 전당을 나서는 관객에게 루어만의 곡예는 어김없이 황홀한 숙취를 남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숙취는 우리에게 ‘영화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글 남동철 [email protected]·김혜리 [email protected] ▶ <물랑루즈>로 돌아온 스펙터클의 흥행사 바즈 루어만 (1)▶ <물랑루즈>로 돌아온 스펙터클의 흥행사 바즈 루어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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