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야, 언제나 내 옆에 있어라. 언제라도 돌아보면 보이는 데 있어줘.” 드라마 <태왕사신기> 3회에서 소년 담덕은, 신전을 모시기 위해 궁에 들어온 소녀 기하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담덕은, 죽어가는 아버지 곁에서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자신을 자조하는 아들이다. “약하고 비겁해. 아주 바닥까지 그런가봐.” 할머니와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 손의 온기를 어렴풋이 좋다고 느꼈던 <집으로…>의 상우가 이만큼 컸다.
<태왕사신기>와 <왕과 나>에서 각각 배용준과 고주원의 아역으로 두 나라의 왕이 된 유승호는 요즘 ‘리틀 소지섭’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2002년의 <집으로…> 이후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2003), <돈텔파파>(2004), <불멸의 이순신>(2004), <부모님 전상서>(2004), <슬픈 연가>(2005), <마법전사 미르가온>(2005), <우리 선생님>(2006), 그리고 <마음이…>(2006)까지, 한해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지금 대중이, 특히 여학생·여성 시청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까닭은 아마도 이 어린 소년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운명 같은 사랑에 뛰어들 영웅의 밑그림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지덕체를 겸비한 왕의 재목이기 이전에 말이다. 소년 배우가 멜로 연기에서 설득력을 보여준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랑을 깨닫는다는 건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다. 그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어릴 적엔 귀엽게만 보이던 덧니도 뺐다. 한달 전에 그는 성치 4개를 빼고 지금 치아 교정 중이다. “그게 처음에는 귀여워 보이는데요, 자꾸 보다보면 싫어져요. 보기 안 좋아요.” 아팠느냐고 물으니, 아팠다고 곧이 대답하진 않는다. “뺄 땐 마취하니까 별로 안 아팠는데, 마취 깨고 나서는…, 네에,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느낌은.” 유승호는 솔직하고 단순하고 명랑하기 그지없는, “현장에서 감독님한테 혼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내가 했던 역할을 친구들이 따라하고 놀리는 게 신경이 쓰이는” 인천 계산중학교 2학년 남학생일 뿐이다. 촬영장소로 이동하느라 그의 차에 잠깐 올라탔을 때, 뒷좌석에 놓인 내신대비용 문제집이 보였다. 10월4일부터 중간고사라고, “이제 16일 남았다”고 카운트를 해준다. “매니저 형아”랑 쪽지시험도 본다. “쪽지시험 못 보면 저한테 혼나죠”라고 매니저 박준성씨가 말하자, 무심하게 라즈베리 스무디를 마시던 유승호가 삐죽이더니 대꾸한다. “시험에도 안 나오는 거.”
데뷔작인 <집으로…> 이후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유승호가 그동안 연기자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은, “연기하다 실수할 때”였다. “저는요, 이상하게 감독님한테 한번 혼나면 그게 머릿속에 오래 남아서, 혼났으니까 잘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실수를 해요. (매니저) 형아한테 혼나면 좀 지나면 나중에 화해하면 되는데 감독님한테 혼나면 그 컷이 끝날 때까지 계속 긴장을 하고 있어요. 진짜로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그럼 더 실수를 하고, 그럼 더 혼나고, 그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 그냥 어떻게 넘어가고 하는 신도 생겨요. 나중에 다시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유승호는 5년 전의 일을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가장 엄했던 사람인, 이정향 감독의 현장. “촬영했던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만날 스탭 형들하고 놀고 그랬던 것만 기억나요. 영화에서 할머니랑 헤어지는 장면 찍을 때도 기억에 남아요. 그때 할머니가 너무 슬프게 우셔서, 저는 그렇게 진짜 우실 줄은 몰랐거든요. 할머니 장면 다 찍고 제 장면을 찍는 데도 옆에서 계속 울고 계셨어요.” 사람이 아닌 동물과 촬영했던 <마음이…>의 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하고 소중했다. “제가 감정신을 할 때도, 사람이면 같이 맞춰주잖아요. 마음이는 그건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걔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표정을 보면 나한테 그게 와닿아요. 마음이가 같이 울어줄 순 없는 거니까 거의 나 혼자 독백하는 영화였는데, 그것만으로도 많은 걸 느꼈어요.”
유승호는 1999년 통신사 광고 모델을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본인의 의지란 게 없을 시절, 부모의 의지였을 것이다.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냐고 하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궁금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이건 나한테는 너무 소중하고, 많은 걸 배우게 해준 일이에요. 촬영하다보면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일이 좋아요.” 그러면 학교와 현장, 둘 중 어느 곳이 더 좋을까. “음…, 감독님한테 혼날 땐 학교가 더 좋고요, 시험기간엔 현장이 더 좋아요.” 유승호에게 지금 중요한 건 2학기 중간고사에서 반 등수 10등을 하는 것이고, 촬영 기간일 때는 내일의 촬영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강변 위로 건물 불빛들이 깔렸다. 앞으로 3년이나 5년 뒤에, 꼭 다시 봤으면 좋겠다고 작별의 인사를 남기자 그가 주저 않고 대답했다. “어, 나 군대 갈 건데.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군대 갈 거예요. 형아가 저보고 해병대 가서 고생 좀 하래요. 그리고 제대하고, 운전면허 따고, 그 다음에 대학 갈 거예요.” 웬 해병대? 매니저가 답한다. “총 쏘고 싶어서 그래요. 해병대 가면 만날 총 쏜다고 했더니.” 영락없는 십대 소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