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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는 배우들이 다 만든다?
2001-10-24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email protected]

“6개월째 캐스팅하고 있는데, 미치겠습니다. 배우 코빼기라도 봐야 애걸이라도 해보지….” “6개월? 난 2년째야 이 사람아…. 내가 이 정돈데 자네들은 오죽하겠나.”

몇몇 제작자와 감독이 만난 자리에서 오간 대화 한 토막이다. 캐스팅의 고충을 토로하는 푸념 끝에, 20년 가까운 경력에 영화계의 맏형 노릇을 하는 한 제작자(몇년간 꾸준하게 작품을 만들고 있는 그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겼다)는 자신도 일부 매니저들로부터 ‘수모’를 당한다며 후배들을 위로했다.

“한국영화는 배우들이 다 만들어, 몰랐어?” 이어진 추임새에 모두 박장대소했지만 그냥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이날 도마에 오른 배우와 매니저가 ‘어떻게 한국영화를 만드는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연 물망에 오른 톱스타들은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한다. 이런 장면은 빼고, 이런 이미지를 좀 넣어달라거나, 심지어 다른 배역의 역할까지 고치라고 요구하는 배우도 있다

② 상대 배역을 누구로 해달라, 누구는 안 된다는 주문을 하며 사실상 주요 배역의 캐스팅을 쥐락펴락한다.

③ 톱스타들은 아예 투자사와 배급사도 특정 회사를 지목해서 제휴하라고 요구한다. 특히 배급사는 특정 회사의 배급 여부가 출연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④ 제작발표회 날짜, 크랭크인 날짜 등은 물론 전체 촬영일정도 주연 톱스타의 지극히 사적인 사정까지 감안해서 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⑤ 일부 톱스타의 경우 자신의 개인 활동을 고려해 개봉 일정을 당기거나 늦춰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⑥ 몇달 동안 시나리오도 제대로 읽지 않고 출연 여부에 대한 대답을 미루다가 결국 거절하거나, 수락한 뒤에는 언제까지 촬영을 끝내달라고 닦달한다.

⑦ 일부 톱스타의 경우이지만 고액 출연료를 다 받고 흥행수익에 대한 인센티브나 지분까지 요구한다. 인센티브가 결과에 대해 보장받는 일종의 투자 개념이라면 일시불로 받는 출연료를 낮추든지, 출연료를 많이 받으면 인센티브를 달지 않아야 한다. 작품의 성격이나 규모에 상관없이 절대액을 요구하거나, ‘누구보다는 더 받아야 한다’는 따위의 단세포적인 주장을 한다

⑧ 일부 톱스타들에게 시나리오는 출연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시나리오를 잘 읽지 않고, 탐독하지도 않는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다음 출연작을 내정하고 특정 시나리오를 ‘기다린다’고 대답하곤 한다. 일부는 실제로 너무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와서 읽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배우들도 있지만 심지어 몇달 동안 들춰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⑨ 출연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감독을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어보겠다는 배우가 드물다. 또 배우와 제작사, 배우와 작품의 소통을 주선하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단하기에 급급한 일부 매니저들의 관행은 일종의 횡포다.

물론 위의 사례들은 일부 배우들에 대한 제작자들의 일방적인 험담을 옮긴 것이어서 일반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공식적이지 않다고 해도 배우와 매니저가 고유 역할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사실상 행사하는 꼴이 된다면, 이에 따르는 심각한 부작용을 우려하게 된다. 바야흐로 영화 제작사가 1천개가 넘고, 기획중인 영화가 줄잡아 수백편에 이르는 상황에서 캐스팅 경쟁은 날로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톱스타의 권리, 기능과 역할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이제 톱스타들이 영화 제작 주체들과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룰도 함께 만들어나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