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살의 남자는 묻는다. 사람은 왜 꼬박꼬박 살까, 띄엄띄엄 살 순 없을까. 열일곱살의 여자는 생각한다. 사는 이유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아. 너무 일찍 지친 남자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소녀. 세상 무엇에도 반짝이지 않던 그들의 눈이 서로를 알아본 순간 잠시 빛을 띤다. 10월15일 저녁 서울 평창동에서 진행된 <버스, 정류장>의 열네 번째 촬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그 조심스런 ‘처음’의 예민한 느낌을 건져올리는 중요한 모멘트. ‘두명이 앉는 좌석이 비었지만 혼자 앉는 좌석에 따로따로 앉아 있는 둘.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단 두줄의 지문만으로 이루어진 신을 만들기 위해, 평창동 한 주차장에 불러들인 36번 시내버스에 올라탄 이미연 감독과 스탭들은 말없이 떨어져 앉은 두 남녀, 그리고 어둠을 적시는 빗줄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건’에 집중했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 부지런히 물을 뿜던 강우기가 침묵한 대신, 침묵하던 김태우와 김민정이 붙어앉아 다정한 대화를 시작했다. 밤 10시경 주차장 바로 앞길에 임시로 세운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 남자가 소녀에게 우산을 사주러 뛰어가는 영화 최초의 ‘러브신’을 잡아낸 이날 촬영은 이튿날 새벽,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그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글 김혜리·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