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로 압도할 것인가. ‘입지’로 방어할 것인가. ‘마케팅’으로 승부할 것인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지난해부터 전국적인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지방 극장가의 최후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메가박스의 10월27일 개관으로 CGV, 롯데 등 3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부산에서 벌이는 최초 결전은 올해 하반기 전국 극장가의 가장 큰 이슈다. 이들 3개 업체가 들어서는 곳은 부산의 새로운 영화중심으로 떠오른 서면 일대로,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멀티플렉스의 싸움은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할 전망이다. 부산이 ‘풍부한 어장’이라는 점도 이들 업체들의 경쟁을 부추긴다. 부산은 1999년 27개이던 스크린 수가 지난해에는 45개로 늘었고, 관객 수 역시 22%의 증가세를 보였다. 연간 1인당 평균 관람횟수도 1년 사이에 다른 지역과 비슷하던 1.6회에서 1.9회로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는데, 상승곡선은 올해도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부산 중심 극장가, 서면에서 남포동으로 이동
사실 부산 극장가의 판도는 지난해 5월, CGV가 서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존 남포동에 위치한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에 의해 좌우돼왔다. 그러던 것이 올해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서면은 남포동에 스크린 수, 좌석 수 모두 뒤진 상태인데도 상반기 권역별 점유율에서 오히려 3∼7%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난 6월16일 롯데시네마 서면점의 11개 스크린이 가세하면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8월, 한 배급사가 집계한 박스오피스 자료를 보면 점유율은 남포동 극장가와 10% 이상 차이가 난다.여기에 7개 스크린, 1500석을 갖춘 메가박스가 밀리오레 서면점에 들어서면 하반기 무게중심은 급격히 서면으로 기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5개관을 갖춘 대영시네마의 경우, 최근의 주말 박스오피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CGV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수기 주말 성적을 기준으로 놓을 때만 그렇다. 서면의 멀티플렉스가 일찌감치 매진사태를 빚어 관객들이 남포동으로 넘어오는 역류현상의 결과일 뿐이다. 비수기나 평일 관객동원 면에서는 멀티플렉스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나마 대영시네마 혼자 버티고 있을 뿐, 한때 잘 나가던 부산극장은 지금 자금난을 겪고 있는데다 조만간 자갈치 3개관을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영시네마의 김도현 운영본부장은 “광복동 등의 상권이 가라앉은 게 가장 큰 이유다.게다가 서면에 스크린 수까지 뒤지는 데다 주차 등의 문제까지 걸려 있어 평일에는 멀티플렉스를 따라잡기 힘들다.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수요가 20% 정도 창출되긴 했지만, 앞으로 남포동 극장가가 변하지 않으면 기존 관객마저 뺏길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 극장이 개관한 지 2년밖에 안 됐지만, 지난 9월3일부터 1200석 규모의 관을 나누어 10개관 이상의 스크린을 갖추고, 전면적인 시설공사에 들어간 것도 멀티플렉스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방편 중 하나다.
인천, 멀티플렉스 바람에 토착극장 낭패
부산에 이어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지역은 대구다. 인구 수가 많고, 아직까지 이 지역을 선점한 이가 없다는 점을 멀티플렉스 업체들은 주목하고 있다. 현재 가장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곳은 메가박스. 대구역 부근에 2002년 3월 10개관, 250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선보인다. 외곽지역이긴 하지만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는데다 현재 개발중인 스펙트럼 시티라는 쇼핑몰 내에 위치하고 있어 멀티플렉스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CGV와 롯데시네마 역시 구체적인 사이트를 물색하면서, 현재 70%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도심 극장 중앙시네마와 한일극장의 아성을 메가박스가 어떻게 깨뜨릴지 지켜보는 상황. 변수는 기존 단관 극장들이 대규모 멀티플렉스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 만경관이 15개 스크린을 갖추고 2500석이 넘는 좌석을 배치, 대구MMC라는 이름으로 재개관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카데미극장 역시 7개관으로 거듭난다. 아카데미극장의 한 관계자는 “메가박스를 비롯해 앞으로 멀티플렉스가 속속 들어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로 증관 배경을 설명했다. 멀티플렉스의 파상공세를 이미 맛본 부산을 곁에서 지켜본 대구 극장가에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까지 41개 스크린으로 늘어난 인천은 2000년 전년 대비 71%의 관객 증가율을 보이는 이변을 연출하며 또 한번 멀티플렉스 파워를 입증했다. 14개관, 3589석을 갖춘 CGV가 입항했고, 부평쪽에 키넥스 5개관이 들어선 결과다. 대신 주안과 동인천지역의 기존 극장들은 CGV의 독식으로 공멸의 상태에 처했다. 미림극장의 한 관계자는 “상권이 쇠퇴한데다 기존의 송현동, 신흥동 등의 주택지역이 재개발 대상지로 결정되면서, 남아 있던 관객마저 신시가지쪽에 위치한 CGV쪽으로 빠져나갔다”고 설명했다. 올해 흥행작이 많았던 시네마서비스 라인의 인형극장과 애관극장만이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등을 걸면서 상대적인 호황을 맛봤을 뿐, 다른 극장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광주는 기존 극장이 우세
대전은 부산과 반대로 롯데시네마가 선점하고, 뒤이어 CGV가 가세한 경우다. 멀티플렉스의 입점 시기 앞뒤로 기존의 동백시네마가 갤러리아백화점 내에 5개관을 유치하고, 선사시네마가 둔산시네마를 통합운영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멀티플렉스의 공세를 당해내지는 못한 듯 보인다. 대전지역 극장조사를 맡았던 한종성씨는 “대부분의 극장이 2개관 이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지역 관객이 멀티플렉스에 몰리는 이유가 자명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제일극장, 동보극장, 수정아트홀은 급격한 관객감소를 경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롯데시네마의 경우, 주말 심야상영에도 평균 좌석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CGV의 등장은 10% 수준이긴 하지만 롯데쪽에까지 타격을 입힐 정도로 막강하다. 여기에 시내 중심부인 태평로에 10개관 멀티플렉스가 들어선다는 말도 돌고 있어, 기존 극장가는 변신을 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광주는 아직도 전통 극장가의 입김이 거센 편이다. 롯데시네마 6개관이 들어서긴 했지만, 크기나 입지면에서 월등하지 않아 6개관으로 늘린 무등극장이나 올해 시네마서비스와 손잡고 4개관으로 변신한 제일극장 등 시내 중심부의 기존 극장들이 장악한 시장을 넘보지는 못하고 있다. 경쟁사로부터 견제를 받아 흥행작을 수급하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어 초반 관객몰이에 실패한 것도 이유다.
롯데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점차 관객이 늘고 있다”면서도 “기존 극장들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스크린이 들어선 롯데백화점이 어정쩡한 시내 주변에 위치한 것도 약점이다. 새로운 관객을 공급해줄만한 주택지가 배후에 없다. 코리아픽쳐스의 김길남 배급팀장은 “소비 중심 도시이긴 하지만, 유동인구가 한정된 권역에 몰리는 지역이라 다른 곳보다 입지가 중요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인구 대비 스크린 수가 서울을 뺀 대도시에서 가장 많다는 점 역시 여타 멀티플렉스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현재로선 시내에 위치한 쇼핑몰 밀리오레에 메가박스 5개관이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서울에 비해 전국 극장가의 가열 속도는 느리고, 또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2년이면 지방 역시 서울 못지않은 ‘전장’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 극장 관계자는 “극장도 다른 업종과 똑같다. 아무래도 서울이 지방보다 낫지 않겠는가”며 현재 멀티플렉스 업체들의 관심이 지방보다는 서울의 부심쪽에 쏠려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울이 1∼2년 안에 스크린 포화상태에 이르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의 극장가에 도래할 전면전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 극장가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글 이영진 [email protected]▶ 멀티플렉스 춘추전국시대 누가 살아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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