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가 갔어요. 완전히 갔어요. 같은 날 개봉한 <조폭 마누라> 에 참패나 다름없는 스코어로 밀리고 있어요.” “그거 보세요. 평론가들이 아무리 거품을 물고 흥분한들 말짱 헛일이라니까요. 이런 판국에선 극찬이나 혹평이나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도박판에서 구경꾼이 훈수를 두다가 뺨맞는 꼴이에요.” 연휴 마지막날 밤에 동업자와 통화를 마친 뒤 허망함과 막막함에 몸을 떨었다. 때는 바야흐로 영화 글쟁이들의 퇴출시대로 접어들고 있구나.
<봄날은 간다>와 <조폭 마누라>의 대결이 처음부터 흥미를 부풀린 까닭은, 두 작품이 워낙 색깔이 다른데다 스크린 수도 엇비슷하게 확보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팽팽한 접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어. ‘뒈지게 웃기는 칼부림’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은 무죄지. 그렇다고 ‘뒈지게 웃긴’ 이들에게 죄가 있다는 뜻이 아니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세태에 죄를 물어야겠어. 오랜만에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에게는 축하를 보내야겠지.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는 충무로의 속설은 이젠 날려버려도 좋을 것 같아. ‘무조건 웃겨라’가 흥행수칙 1호가 되었으니까. 주제나 메시지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말아야 해. 베끼면 어떻고 아류작이면 또 어때. 구린내를 뿜든, 피비린내를 풍기든 어떤 무리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땜질하면 그만이지. 엽기녀가 승객 머리 위로 게워내는 걸 봤지. 임신한 조폭녀를 발로 짓이겨 낙태시키는 것도 봤잖아. 요즘 관객이 자극에 얼마나 무뎌진지 알아? 어지간한 충격요법은 씨알도 먹히지 않아요.
깡패로 설칠 것인가, 코미디언으로 호들갑을 떨 것인가. 아니면 두 캐릭터를 적당하게 합성할 것인가. 결론은 깡패에겐 의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순정과 눈물과 개그를 보충하기에 골몰했고, 그래서 ‘웃기는 주먹’이 탄생한 거야. 코미디의 본령이 풍자와 해학이라는 것도 먹물들의 흰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겠지. 극장이 ‘검은 도서관’이라니, 당치도 않는 말일 거야. 관객이 머리를 비우려 극장에 오는 걸 몰라? 무조건 웃기고 보자는 거야. 억지스럽고 썰렁해도 마구 밀어붙이면 승부가 끝나거든.
“좋은 시나리오 없이 좋은 영화 없다”는 철칙도 믿을 수 없게 되었어. 플롯의 엉성함은 말장난 수준의 유머나 과장된 동작의 반복으로 너끈하게 메울 수 있기 때문이지. ‘좋은 영화란 재미있는 영화’라는 주장에 시비를 걸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영화가 바로 웃기는 영화라는 공식은 어디서 나왔지? 사실, 충무로는 코미디영화의 전통이 없는 곳이어서 웃음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사건의 개연성이나 논리적 연결쯤은 갖춰야 하잖아. 도대체 사람을 개 패듯 패면서 웃기려는 심보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 거야? 정신분석학 측면에서 따져보고 싶어.
좋은 영화가 뭐겠어. 좋은 소재에 좋은 표현이 아니겠어? 주변을 둘러봐. 코미디 소재는 지천으로 널려 있어. 미군부대 음식쓰레기를 한국인들이 돈을 내고 맛있게 끓여먹었다는 얘기야말로 기막힌 소재야. 냉전몰이에 환장한 논객들의 궤변을 스크린에 옮기면 죽여줄 거야. 평론가 이명원 선생이 그랬어. “영화작가라면 세끼 밥 걱정만이 아니라 영화는 무엇을 위하여 만들어지는가 하는 물음으로 맞받아야 한다”고 말이야. 웃음 뒤의 칼날처럼 냉철한 지혜와 투시력이 필요해.
지난 여름, 메이저 배급사들의 독점욕은 가관이더군. 5편의 영화가 전국 극장의 95%를 장악했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덤비면 죽는다’식 위협은 조폭단의 행동강령을 빼닮았어. 충무로가 ‘공포의 도떼기시장’으로 불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이런 살벌한 전투장의 틈을 비집고 한국영화 몇편이 곧 선을 보인대. 규모는 작아도 정직하고 진실함이 엿보인다지만 싹쓸이판에서 얼마나 버텨낼지 불안해. 어쩌면 조폭녀의 ‘가위권법’에 줄줄이 ‘추풍낙엽’ 신세가 될지도 몰라.
영화 몇편이 떼돈을 벌어들였다고 한국영화의 ‘봄날’이 온 줄 알아? 착각하지 마. 잔칫상에 재를 뿌리지는 않겠어. 기술력과 포장술은 알아주어야겠지. 하지만 한국영화의 갈 길은 험난하고 아득해. 작품마다 ‘인간’, ‘인생’, ‘민족’이라는 단어로 풀어낼 수 있겠어? 평론가들의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나도 하루에 수백번씩 반성하고 절망해. 영화란 시간을 죽이는 오락이기도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의 말대로 ‘영혼을 경작하는 트랙터’이기도 하지. 영혼의 새순이 돋게 하는 영화를 그대와 함께 만나고 싶어. 정말이야.
박평식/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 <조폭 마누라> 예상 뒤엎은 흥행폭풍, 부정적 영향 우려 목소리 높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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