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으로 더듬는 지난 시간들
오늘, 우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도 늘 과거의 어떤 지점과 닿아 있게 마련이다.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대사의 뉘앙스나 동작의 디테일은 아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죠.” 무너져가는 집과 가난의 무게에 눌려 있을지라도 친구에게 꾼 돈으로 콩나물 대신 새 휴대폰을 사고, 균열이 이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떡볶이를 떠올리고, 앓는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집 다락방에서 남몰래 머리색을 고치는 아이들. 그저 나쁜 애, 착한 애, 멍청한 애, 우울한 애로 판단할 수 없는, 한 면만 가진 종이인형이 아닌 다면체의 복합적 인간들이 숨쉬는 공간. ‘이 아이, 이 시나리오에 나타나기 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배우들이 유추해낸 자신들의 전사(前史)는 단순히 지문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흐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태희가 멍하니 만두를 씹어 삼킬 때, 카메라의 움직임도 그 흔한 음악 없이도 울컥 울음이 터져나오 것도 이 때문이리라.
옥지영이 생각하는 지영의 과거
81년도에 태어났다. 엄마, 아빠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단 하나 기억하는 건 나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떠나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부모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할아버지는 아빠가 산에서 돌아가셨다고 하고 울 엄마는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 나를 이리로 떠밀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은 걸 보고, 느끼고, 경험했다. 나만 노력하고 잘하면 다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맘속에 있는 무언가를 떨쳐버리고 또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나만의 그림. 이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내 마음속의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여상에 갔다. 난 원래 버려지는 삶이고 가난한 삶이고 이런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니까….
이요원이 생각하는 혜주의 과거
어릴 적부터 꾸미는 걸 좋아했다. 욕심도 많아서 예쁘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에 들어와야 했다. 막내라서 집에서는 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님의 싸움이 간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부모는 부모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중학교는 남녀공학을 나와 남자아이들과도 서슴없이 지낼 수 있는 그런 아이였다. 성적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인문계에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일찍 독립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사회에 나가 돈도 벌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상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1학년 때 서지영이란 친구를 처음 알게 됐다. 그에게선 왠지 모를, 나랑은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게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지영이와 친해지면서 우린 현재보다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2학년이 되면서 태희와 비류, 온조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5명은 항상 같이 다녔다. 모두들 하나같이 성격도 취향도 다르지만 우린 그것 때문에 서로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그리고 혼자 힘으로 ‘나’를 완성하다‘내레이션 써보기’는 배우들이 가장 공을 들인 숙제이기도 했고, 감독으로서는 꽤나 효과적이고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자기 나름의 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계발하는 거죠. 이런 건 감독이 요구할 수 없는 거거든요.” 결국 편집된 영화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각 신마다 자신의 심리를 담은 내레이션을 직접 써내려간 배우들은 그때까지 타자로 생각되던 영화 속 아이들이 비로소 자기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다른 이들의 내레이션을 바꿔쓰면서는 ‘네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내마음은 왜 이해가 안 될까?’ 같은 일생을 따라다닐 의문부호를 너무 일찍 알아버리기도 했고. 그렇게 모여진 비밀일기 같은 내레이션은 때론 분할된 화면처럼 동시간에 다른 꿈을 꾸기도 했고, 때론 꼭 걸어 잠근 방문 안에서 다른 시간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4 “다음주에 기계 처분되면 월급주마, 그동안 수고했다.” 만수공단
지영/ 열받는다. 단 한번에 어떻게 자를 수가 있냐? 아무리 그래도 월급도 안 주고…. 난 어찌하란 말이냐!!! 구석탱이에 쪼그리고 있는 고양이. 나처럼 갈 곳이 없나보다. 너도 나처럼 슬프구나.
#18 “유학은 아무나 가니? 돈이 있어야 가지.” 혜주생일 화장실
혜주/ 현실을 회피하는 지영이가 답답하다. 아픈 곳을 찔러주면 삐딱하게 나오는 지영이가 안타까울 뿐이다. 톡 쏘고 간 후 혼자 남은 내가 바보 같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지영/ 혜주는 화장하니까 참 이쁘다. 근데 이쁜 입에서 왜 저런 말이 나오는지…. 정말 갈수록 맘에 안 든다. 내 걱정말고 니 앞가림이나 잘해라.
#37 “왜 타이프로 시를 쓰냐고? 그래야 너를 만날 수 있잖아….” 주상의 방태희/ 주상이의 매력이란… 가끔 던지는 민망하리만큼 솔직한 한마디에 있는 걸까? 주상이랑 같이 있음 너무 포근하다. 그 아이의 미소가 참 예쁘다. 앗! 부·끄·럽·다. 맥반석체험실에서 할 일 없이 낮잠이나 자는 유태희가 주상이 앞에서는 빛이 되는 것 같다. 좋다.
#40 “절대로 산에 가지 마라. 니 애비 산에서 죽은 거 알고 있지?” 지영집
지영/ 이렇게 오래된 집을 세를 놓으면 고쳐주든가 아님 가격을 내리든가. 양심도 없는 것들! 지긋지긋하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할아버지. 똑같은 레파토리가 지겹다. 날씨가 정말 춥구나. 우리 고양이가 정말 심심했나보다. 혼자 있으면 당연히 외롭겠지. 미안하다. 우리 고양이한테….
#47 “또 사?” “갖구 싶은 게 계속 보이는데 어떡해.” 동대문 의류상가
혜주/ 애들하고 오랜만에 동대문에 왔다. 난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아서 신나게 쇼핑을 했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한 우리들은 각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젠 점점 서로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영/ 어쩌다 또 서울까지 오게 됐지? 돌아가고 싶다. 우리가 혜주 들러리도 아닌데 왜 쫄쫄 따라나니는지 정말 싫다. 이곳에 있는 예쁜 옷들, 그림의 떡이다. 어디가 어디지? 정말 어딘지 모르겠다. 돌아가야겠다.
태희/ 무난하던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인간은 암만 생각해도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지영이를 그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혜주의 ‘쏜다’는 한마디에 떡볶이에 오뎅국물을 연상하다니…. 한심하다.
비류와 온조/ 아이들이 모두 없어졌다. 사려던 옷을 빨리 갈아입고 아이들을 찾으러 가는데 예쁜 장신구들을 파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엔 우리도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 우린 서로가 너무 걱정되었다.
#60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시내버스
태희/ 내가 매번 이런 걸 사는 것이 과연 이 아저씨들에게 도움이 되긴 되는 것일까? 그 무슨 신문에서 보니까 뒤에 검은 조직들이 조종한다거나 사기꾼도 많다는데. 나의 희생정신이란. 이런 칫솔 사가지고 들어가면 분명 아빠가 쓸데없는 짓 하고 돌아다닌다고 핀잔 줄 게 뻔하다고…. 그러니 희생정신이 아니고 뭐겠어요….
#66 “이거 니가 그린 거야?” “맘에 들면 가져.” 자유공원
지영/ 우리집으로 찾아온 태희…. 어떻게 대해야지? 오랜만이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거 반갑지 않다? 날 동정하겠지. 이런 날 우습게 보겠지. 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날 생각해주는 이 아이한테는 왜 이리 기대고 싶어지는지….
태희/ 니가 그런 표정 짓고 있어도 나한테는 니가 멋져 보여…. 하핫! 그래도 나보단 그림 그리는 재주라도 있는 니가 더 낫지 않을까? 아무 말 없어도 우린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놓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영이가 나의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
#102 “하루에 열번도 넘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분류심사원
지영/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미움도 컸다. 나에게도 사실은 감정이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을 감추고 싶었다. 눈물이란 게 정말 싫다. 약해지고 싶지 않다. 동정받는 것도 싫다. 하지만 난 힘들다. 난 아직 어리다. 어린 나이에 나한테 모든 것이 벅차니까, 너무 커다란 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112 “그런 거에 민감한 건 일종의 콤플렉스라구.” 호프집
혜주/ 그래, 나두 얘기하고 싶어. 회사사람 흉보고, 막 욕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럼 내가 더 한심스럽고 바보 같아서 못하겠어. 그 사람들은 우릴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조차 안 할 테니까….
#119 “가면서 생각하지 뭐.” 신공항
지영/ 발걸음이 가볍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발길 닿는 곳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태희야? 넌 괜찮니? 우리 잘되겠지? 그래 우리 이렇게 살자.
지난해 겨울, 정재은 감독의 방안으로 고개를 삐쭉이 내밀었던 다섯 마리 고양이들은 조금 색다른 트레이닝을 맛보았다. 불타오르는 훌라후프를 한번에 통과하는 재주나, 애드벌룬 위에서 춤추는 단순반복의 훈련 대신 영화를 봐라, 내레이션을 써와라 하던 정재은 감독의 지적 고문(?)은 그러나, 오랫동안 꽤나 행복한 트레이닝으로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의 어깨에 지워진 무게를 누군가의 유쾌함으로 덜고 외따로 사는 삶이 아닌 함께 가는 방식을 알아간 영화 속 아이처럼, 이 다섯 배우들은 이제 일생에서 다시 찍을 수 없는 영화 한편을 보물처럼 안아들고 저마다의 여정에 섰다. 그저 우리는 이들의 아리송한 암호로 쓰여진 시를, 그 ‘도형일기’를 알아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백은하 [email protected]▶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1)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2)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3)
▶ 여섯번째 주인공 ‘티티’ 찾아 삼만리